• 입력 2016.11.29 14:31

여성 혐오, ‘여혐’은 지뢰다. 새로 개발된 무기 여혐은 성폭력 수류탄과 함께 생활, 문화, 도시의 곳곳에 숨겨져 있다 우리의 발목을 노린다. 이번에는 잘 나가는 랩퍼 디제이 덕이 걸려 부상이 심하다. 급기야 가수는 사과를 하고 가사를 바꾸었다. 통탄할 일이다. 미적인 감각은 말할 것도 없고 반(反)문화적이고 반문명적이다. 박통 때 금지곡이나 지금 대통령 ‘미스 박’의 블랙리스트와 뭐가 다른지 알 수 없다.

문제가 된 <수취인분명>의 가사는 “미스박 you”와 “하도 찔러 대서 얼굴이 빵빵,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이다. “미스 박”에서 미스mis는 천한 일을 하는 여자를 부르는 호칭을 떠오르게 한단다. 미쳤다. 아예 사전을 새로 만들어라. 다음 “하도 찔러 대서 얼굴이 빵빵”은 성적인 행위를 연상시킨단다. 음란마귀에 빙의된 섹스지상주의적인 발상이다.

“빽차 뽑았다 널 데리러 가”는 남성 우월의 ‘야타’와 다를 바 없다고 한다. ‘빽차’는 경찰차의 비속어다. 빽차가 뭔지 모르면 모른다고 입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 일부 여성단체의 이 발목지뢰는 마치 여성가족부가 금지했다는 ‘조리퐁’, ‘고깔콘’, ‘소나타3 라이트’ 괴담과 다를 바 없다. 이러니 미친 존재감의 여가부와 페미니즘 여성단체가 겹쳐 보인다. 여가부만 해도 암담한데 여성단체까지 가세하니 돌아버릴 지경이다.

여혐의 논리는 첫째, 여성이 느낀 감정이다. 남자에게는 아니지만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어법 때문이라고 한다. 이게 여성에게 모멸감을 준다는 것이다. 박근혜의 경우 여성이라서 개판이라고 비난하는 건 여혐 맞다. 박정희나 전두환은 남자지만 더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Miss도 아니고 접두어 미스mis는 억지다. 만약 외국에서 하듯 마담이라 했다면 더 난리가 났을지도 모른다. “빽차”도 마찬가지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속담이 답이다.

다음은 숙명여대에 붙은 대자보에 나타난 집회에서 여혐, 성폭행 드립이다. 여기에 “여자를 꽃”이라 해서 기분 나빴다는 꽃 드립까지 가세한다. 100만이 모였다면, 모두가 민주적 열망만으로 가득할 수 없다. 별 사람이 다 있게 마련이다. 게다가 사람이 많으니 개인적인 공간을 유지할 수 없고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상한 사람이 비좁은 틈을 이용해 성추행을 한다면 정당한 힘으로 물리쳐야 할 것이다. 군중 속에서 “성추행이야”을 외친다면 주변에서 도울 것이다. 문제는 이 여성분들은 모든 사람이 너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박근혜의 생각과 다를 바 없다. 그렇다. 자기가 자기를 돕지 않으면서 집회의 성추행 타령은 이기적 편의주의일 뿐이다.

혐오를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개인적일 뿐 아니라 명확하지도 않다. 현대 민주주의는 죄형 법정주의와 증거주의를 채택한다. 왜 그럴까? 혐오가 기준이면 결국 마녀사냥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에서도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산업화와 미풍양속을 저해하는 혐오의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여혐의 논리에서 박정희와 박근혜가 보인다는 말이다. 중세 마녀사냥의 논리도 별 다를 바 없었다. 지금 여성들은 자기를 탄압했던 케케묵은 억압 논리를 들이대며 민주, 해방, 평등을 찾는다. 그저 바보들의 헛소리로 들린다.

이 모든 사태에는 여성에 대한 배려의 요구가 있다. 배려를 요구하려면 보편적인 가치인 ‘평등’을 포기해야 한다. 평등을 외치려면 자기에게만 다른 처우, 단어 적용, 즉 배려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평등에 따르는 모든 불편과 평등을 위한 의무를 치러야 한다. 즉 ‘레이디 퍼스트’ 따위는 없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디제이 덕을 금지하는 여성은 모든 면에서 자기의 ‘심기’를 배려하라고 한다. 배려란 뭘까? 바로 평등이 져야 할 불편과 의무를 비껴가려는 꼼수다. 배려라는 이름의 꼼수로 가득 찬 세상이다.

꼼수주의자들은 배려와 감정이입한 남자를 도덕적이라 한다. 세(勢)불리기다. 도덕이란 게 우습다. 도덕은 ‘착한 것’이라기보다는 착한 자와 나쁜 자를 가르는 줄긋기다. 한편이 도덕이면 다른 한편은 부도덕이다. 한편이 정의면 반대는 불의다. 따라서 페미니즘에서는 자기편이 아닌 남자는 다 부덕하다고 배제한다. 도덕과 정의의 명분을 쥐었다고 주장하며 줄을 그어대고 있다.

디제이 덕이 그렇듯 남자로 산다고 부도덕은 아니지만 낙인은 찍혔다. 하지만 줄이라는 게 초딩들 책상에 줄긋기다. 도덕은 좋은 ‘것’이 아니다. 사람 사이에서 생겨나는 ‘좋은’관계는 일방적으로 하나의 ‘것’으로 묶을 수 없다. 다른 ‘좋은’ 관계도 생기고 바뀌기도 한다. 그어 놓은 줄은 쉽게 무시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게 바로 페미니즘이 지닌 한계다.

문화 예술가인 디제이 덕에 대한 여성단체의 검열과 금지는 박정희와 박근혜를 잇는 독재정권의 마녀사냥 논리와 다를 바 없다. 미적인 대상을 개인적이고 명확하지도 않은 감정적 잣대로 폄하할 수 없다. 따라서 디제이 덕에게 가한 여성단체의 압력은 결코 도덕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은 비도덕적이며 추악한 악행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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