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29 16:13
마오쩌둥의 후처이자 산둥 출신인 장칭(江靑). 그녀의 강한 성격은 중국을 10년 동안 재난의 국면으로 몰아간 문화대혁명의 막전막후에서 도저하게 드러났다.

그럼에도 공융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의 기질은 매우 굳세다. 앞의 일부 지역을 지나면서 쓴 표현이지만 한자로 적으면 ‘강렬(剛烈)’함이다. 이는 우리가 자주 쓰는 ‘강렬(强烈)’과는 다르다. 앞의 강렬함은 사람의 의지가 매우 견고해 바깥으로 그를 표출하는 기운도 강함을 표현한다. 뒤의 강렬은 봄에 피는 벚꽃처럼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왔다가 역시 한꺼번에 와르르 몰려나가는 짧은 박자(拍子)의 ‘세기’만을 나타낸다.
산둥의 그런 강렬함은 공융의 뒤에도 이어졌다. 산둥이 자랑하는 또 하나의 영웅이 있다. 바로 척계광(戚繼光)이다. 그는 명나라의 장수로서 당시의 중국인이 가장 골머리를 앓았던 왜구(倭寇) 퇴치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인물이다. 아울러 중국의 역대 명장(名將) 가운데 가장 잘 싸웠던 사람의 하나로 꼽힌다. 그 역시 대단한 기개와 빼어난 지혜로 당대를 풍미했던 영웅이다.

그는 10여 년 동안 중국 동남 해안의 왜구 격퇴에 힘을 기울여 상당한 공적을 쌓은 뒤 이어진 10여 년 동안에는 북방으로 진출해 당시 명나라를 위협하던 몽골 세력과 싸움을 벌여 전선을 안정시켰던 사람이다. 역시 중국이 자랑하는 민족영웅이다. 아울러 그는 북방 유목 세력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만리장성 축조, 화포(火砲)를 비롯한 다양한 무기 체계의 연구와 개발에도 상당한 공헌을 했던 사람이다.
그는 산둥의 좋은 기질이 좋게 발현한 경우다. 비교적 좋지 않은 모습으로 그 산둥의 기질을 이어받고, 표현한 사람으로는 장칭(江靑)이 있다. 그는 현대 중국의 건국 영웅 마오쩌둥(毛澤東)의 후처(後妻)다. 우리에게 비교적 친숙한 인물이다. 그 역시 산둥이 지닌 강렬함의 계승자다. 그러나 그 강렬함으로 어느 곳에 불을 지폈을까. 1966~1976년 동안 중국을 초대형의 재난으로 몰고 갔던 이른바 ‘문화대혁명(文化大革命)’이었다. 결국 그는 감옥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중국은 이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혹심한 피해를 입는다. 지금까지 이 기간 벌어진 극좌적 실험에 대한 평가는 최종적으로 내려지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어서 총체적 평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산당 고위 관료뿐 아니라 지식인, 일반 중국인에게도 이 문화대혁명은 거대한 재난이었다. 중국에서는 이를 ‘十年大浩劫(십년대호겁)’이라고 적어 당시의 잔인했던 폭력을 기억하고 있다. 장칭은 그 극좌적 실험의 가장 선두를 달렸던 산둥의 강렬한 성격의 인물이다.
현대 중국에서 이 산둥 사람들은 여러 모로 두각을 나타낸다. 가장 큰 영역은 군대다. 산둥 출신 군인들이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축을 이룬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우리 귀에 들려왔다. 이른바 인민해방군 안의 산둥방(山東幇)이다. 강렬한 기질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어떻게 보면 군대다. 이것저것 다 따지는 성격은 군대에 맞지 않는다. 중국 국방을 오랜 동안 휘어잡았던 장완녠(張萬年), 츠하오톈(遲浩田) 전 국방부장이 대표적인 산둥 출신 군인이다.
장쩌민(江澤民)의 3세대 권력그룹, 그리고 후진타오(胡錦濤)의 4세대에 이어 시진핑(習近平)의 5세대 권력이 올라섰다. 그로부터 10년 뒤면 제 6세대 권력 그룹이 등장한다. 그 선두에 서 있는 사람이 쑨정차이(孫政才)다. ‘정치에 재주가 있는 사람’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닌 이 사람은 다음 세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 아니면 국무원 총리 정도를 맡을 수 있는 인물이다. 최고위에 진입할 차세대 최고 우량주다. 그 역시 산둥 출신이다.
산둥의 강렬함은 그에게서 어떻게 발현할지를 지켜봐야 한다. 공융 식의 배짱과 기지로 나타날지, 아니면 척계광 식의 천재적 전략 및 전술가로 나타날지 모른다. 마오쩌둥의 처 장칭 식으로 나타난다면 중국에는 재앙이다. 그저 우리는 조용히 그를 지켜볼 뿐, 다른 방법이야 있을 수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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