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2.05 10:48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등장하는 화제 가운데 하나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물음에 “운명이라는 것은 용기 있는 본인이 만들어간다”고 주장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저항해봐야 어쩔 수 없이 주어진 운명이 있다”고 주장한다. 나의 경우는 이래저래 고군분투해봤지만 결국 후자. 내게 주어진 힘센 운명과 씨름하고 운명을 달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다.

사람들이 운명을 입에 올릴 때는 대개 인생에 서늘한 칼날 같은 시간이 닥칠 때이다. 볕 들고 포근한 시간에는 운명을 생각할 겨를도 없다. 날카로운 칼날이 눈앞에서 번득일 때 무엇을 어찌해야 좋을지 고민하면서 내일의 운명을 전전긍긍 궁금해한다. 진심으로 운명의 페이지가 궁금하다. 이 시간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운명의 페이지를 넘겨보고 싶다. 그러나 책은 굳게 닫혀 있고 점점 다가오는 날카로운 운명 앞에서 긴장하게 된다. 그 칼날에 상처도 입는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이 상처만 남기는 것은 아니다. 때로 칼날은 부위 부위를 잘라내고 흥미로운 모양을 남겨준다. 운명의 페이지 역시 그러한 칼날이 지나간 후에야 공개된다. 칼날이 지나간 후 남겨진 모양이 의외로 아름다워 놀라게 되는 순간도 있다.

칼날이 지나간 페이퍼를 소재로 한 그림을 한 장 소개하고 싶다. 칼 폰 베르겐의 ‘종이 화환을 갖고 노는 두 소녀’다.

Carl von Bergen <Two Girls Playing With A Paper Garland> 1905

칼 폰 베르겐 (Carl von Bergen 1853~1933)의 ‘페이퍼 갈란드(종이를 잘라 화환 모양을 만드는 공작품)를 갖고 노는 두 소녀’는 한 번 보면 잊지 못할 정도로 예쁘고 따뜻한 그림이다. 독일의 장르 화가인 칼 폰 베르겐은 아이들의 소박하고 다정한 미소를 그리는 데 능했다. 그는 아이 전문 화가로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을 주제로 하여 행복이 가득한 그림을 그려낸다. 어린 여동생을 위해 종이 화환을 만들어 보여주는 언니의 미소와, 언니를 신뢰 가득하게 바라보는 동생의 모습은 이 그림의 매력 그 자체다. 언니의 입 끝에 모인 미소, '짠'하며 들어 올리는 종이 화환의 손에 손잡은 모양, 뒤쪽 창문을 통해 역광으로 반짝이는 언니의 금빛 머리카락, 그 빛을 온전히 받고 있는 어린 여동생. 그 모든 것이 이 그림을 충만하게 하고 관람자의 마음에 그 온기를 넘치도록 옮겨 준다.

그림의 주인공은 언니와 동생이고 대개 관람자는 둘 중 하나에 자신을 대입하여 그림을 보게 된다. 나의 경우 어린 여동생에게 마음이 이입되었다. 언니의 칼질을 오래오래 기다리고 투정을 부렸을 어린아이. 무엇이 나올지 모르므로 언니의 칼질을 지켜보는 가운데 긴장만 했을 아이. 그리고 눈앞에 예쁜 화환이 '짠'하고 펼쳐졌을 때의 즐거움에 내 마음이 가닿았다. 그런 내게 종이 화환을 보여주며 미소 짓는 언니는 나의 운명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녀의 무릎에는 수없는 칼질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이 조각들은 손에 손잡은 종이 화환들과 대조되어 뜨거운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운명론자이고, 나의 운명의 한 페이지를 엿보고 싶어 매일 간곡한 마음으로 조른다. 이 책은 굳게 닫혀 있고, 당신이 들고 있는 칼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그러나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대답 없이 미소만 지으며 기다리라는 듯 손을 내젓는다. 부탁할 시간도 부족한 나는 어쩔 수 없이 바쁘디 바쁜 일상으로 돌아오고 한 달 두 달, 일 년 이 년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된다. 그때 그의 미소와 그의 가위질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게 된다.

운명을 확인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다. 길고 지루한 시간이 지나면 그의 손짓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때의 칼질이 어떤 모양을 만들어내는 것인지를 차차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들이 눈앞에 펼쳐질 때 즐겁게 웃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래 기다렸다며, 나의 운명이 '짠'하고 나의 귀한 운명을 드러내고, 그제야 드러낸 나의 웃음에 화답할지도 모른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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