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인철기자
  • 입력 2017.03.23 08:56
신선조는 에도막부를 사수하려 끝까지 저항한 세력이다. 역사적으로 실패한 세력이지만 후손이나 관련 도시들은 여전히 그들을 기억하는 추모제와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사진출처=福島民友新聞

[뉴스웍스=최인철기자]내년이면 메이지유신 150주년이다. 역사의 승자들에게는 메이지유신은 막부를 무너뜨리고 근대화를 이끌어낸 것으로 기억된다.

하지만 막부말기 1863년 교토에서 결성된 '신선조(新選組, 신센구미)'는 정규병력이 아닌 쇼군과 막부를 수호하는 목적의 일종의 특수부대로 시작해서 막부가 무너진 이후 1869년까지 항복하지 않으며 끝까지 결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도막부 말기는 사쓰마번(가고시마, 薩摩藩)과 조슈번(야마구치, 長州藩)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유신 세력과 도호쿠지방의 아이즈현 등을 선두로한 연대세력이 최후의 결전을 벌이던 시기다. 
쇼군과 막부 수호를 위해 결성된 신선조는 처음에는 20여명에서 시작해 최대 200명까지 세력을 불리며 막부를 무너뜨리려는 사쓰마-조슈 유신세력을 암살하거나 습격하면서 악명이 높았다. 잔혹무도한 테러에 가까운 살상 행위는 '공포'를 불어일으킨다. 1868년 교토와 나고야의 중간지역인 도바-후시미 지역에서 발발한 보신전쟁에도 적극 참여하지만 유신세력에 패배하자 홋카이도 하코다테까지 후퇴하면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신선조의 최후는 사실 막부의 종말에 이어 근대화에 따라 갈길과 일자리를 잃은 '사무라이'의 최후를 드러낸 상징적인 존재로 현재 평가받는다. 메이지유신으로 지방영주인 다이묘가 사실상 붕괴되고 다이묘를 보호하는 사무라이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다. 
칼과 창을 자랑으로 삼는 사무라이들에게 총과 대포로 무장한 근대화 정규군대로 편입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천년에 가까운 사무라이의 영광이 일시에 사라지는 시기에 신선조의 피맺힌 저항은 소설, 영화, 드라마 소재로 딱이다. ‘무사 중의 무사’, ‘최후의 무사’ 신선조. 어중이 떠중이로 시작했다가 마지막에는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스스로 감당한 그들의 모습은 6년간의 활동기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비해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남게 된다. 
신선조의 깃발에는 ‘성(誠, 마코토)’이 쓰여있다. 별동대지만 끝까지 막부를 지키고자 했던 절실함과 진정성을 담은 의사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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