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2.18 18:00
중국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오른쪽)과 전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왼쪽)은 유명한 중국계 정치인이다. 이 둘은 객가 혈통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2016년 1월 16일 대만(台灣)에서는 총통(總統:우리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이날 선거에서 민진당(民進黨)의 차이잉웬(蔡英文)후보는 국민당(國民黨)의 주리룬(朱立倫)후보와 친민당(親民黨)의 쏭추위(宋楚瑜)후보를 물리치고 대만 첫 여성 총통이자 14대 총통이 됐다.

차이잉웬 후보는 한족(漢族)출신 객가인(客家人HAKKA People)이라고 한다. 이 객가 사람들이 오늘의 주제다. 이들은 광동(廣東)의 대표적 군체(群體) 중 하나다. 앞에서 설명한 광부(廣府)문화, 조산(潮汕)문화의 구성원들과 함께 3대 그룹을 형성한다.

광부문화는 광주(廣州)를 중심으로 한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조산문화권은 광동 동부지역 해안가 중심인 반면, 객가 사람들은 광동 북부 등의 산간지역에 터전을 형성했던 경우가 많다. 이들 객가는 중국 인문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대상이다.

객가가 우리에게 주는 정보 중에 관심을 끄는 대상은 그들이 배출한 유명인사들이다. 중국의 2세대 지도자 등소평(鄧小平)을 비롯해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 심지어 이번 선거로 대만 총통에서 물러날 마잉지우(馬英九), 그리고 그에 앞서 대만 총통을 역임한 리덩후이(李登輝) 등이 다 자칭타칭 객가 사람이다. 홍콩 은막을 주름잡았던 저우룬파(周潤發) 등 유명 연예인 등도 객가 혈통을 지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 과연 객가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들은 고대 중원지역에서 전란과 굶주림, 그리고 각종 재난을 피해 남부로 피난해온 한족(漢族)들이라는 게 정설이다. 동진(東晋) 이후 시작된 이들의 남하는 당나라 말기 황소(黃巢)의 난을 거치면서 그 후 다시 금나라나 원나라의 침입으로 남송(南宋)이 장강 이남으로 수도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이어진다.

후에 청나라에 이르러 강희(康熙)황제가 이들을 사천(四川)과 광서(廣西), 대만(台灣)으로 이주를 격려하자 그에 적극 따르기도 했다. 청나라 말에는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일으켜 토지 재분배를 요구하고, 여성의 발을 묶는 전족(纏足) 반대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결국 지배층의 진압으로 난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 때문에 적지 않은 객가 사람들이 청조의 압박을 피해 홍콩 마카오 및 동남아시아로 흩어졌다.

그러나 남부로 피신한 한족들을 다 객가 사람들이라고 볼 수는 없다. 객가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객가 사람들은 남다른 언어와 습속, 건축양식 그리고 시가 등 특징들이 있다. 첫째 조건으로 객가 사람들은 반드시 객가어를 할 줄 알아야 한다.

객가어는 한어(漢語) 7대 방언중 하나다. 그 7대 방언은 북방화(北方話: 북방어. 또는 北語), 광동화(廣東話: 광동어. 또는 粵語), 강절어(江浙話: 강소, 절강어 또는 吳語), 복건화(福建話:복건어 또는 閩語 등), 호남화(湖南話: 호남어 또는 湘語), 강서화(江西話: 강서어 또는 贛語)에 객가어 등을 일컫는다.

객가어는 고대 중국말과 무척 유사하다고 한다. 고대 중국말은 고한어(古漢語)라고 적는데, 객가어가 그 전통을 상당히 많이 계승해 고대 중국말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도 말한다. 객가 선조들은 후손들에게 유형적인 재산보다는 무형적인 유산을 많이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객가의 조훈이다. 객가조훈(客家祖訓)이라고 적는 이 무형의 유산은 조상들이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내용이다. 조상이 전하는 인생의 교훈 정도로 받아들이면 좋다. 그 안에는 이런 말들이 있다. “寧賣祖宗田, 不忘祖宗言(선조들의 밭을 팔지언정 선조들의 말은 잊지 말아라)."

객가 사람들에게 있어서 객가어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 언어의 전통은 고스란히 이어진 편이다. 따라서 그 안에는 자연스레 옛 중국말의 여러 형태가 담겨 있다. 그런 이유로 인해 객가어를 고대 중국어의 생생한 화석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객가 사람들의 주된 거주지는 광동성, 복건성, 강서성 등이다. 물론 그 밖에 호남(湖南), 사천(四川), 광서(廣西), 절강(浙江) 등지에도 분포하고 있다. 해외 지역으로는 대만과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 등도 꼽힌다. 중국에만 약 5000만 명(2013년 추산), 해외에는 약 1200만 명 정도가 있으니 모두 합치면 6200만 명에 달한다. 대만에만 500만 명이 살고 있으니 리덩후이와 마잉주, 차이잉원의 세 총통이 객가 출신이라는 점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

18세기 말 동남아시아 보르네오 섬 서쪽 현재 인도네시아 Kalimantan Barat 주에 광동성 매현(梅縣) 출신의 첸란보(陳蘭伯)와 뤄방보(羅芳伯) 등 다수의 객가 사람들이 정착한다. 이들은 그곳에 사는 중국인 그룹과 현지 주민들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서방 세력으로부터 오는 간섭을 막아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어 그들은 제안 내용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일종의 ‘경비회사’를 차렸다.

이 회사가 점차 주민들의 신뢰를 얻어 결국 란방 공화국이란 나라를 세운다. 란방 공화국은 한자로 蘭芳共和國이라 적는다. 객가어로는 Làn-fông Khiung-fò-koet라고 발음한다. 때로는 란방공사(蘭芳公司), 란방대통제공화국(蘭芳大統制共和國)이라고도 한다. 12명의 총장을 내면서 107년 동안 그곳에 있는 중국인 그룹과 지역 주민들을 보호하고 통치했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네덜란드에 의해 패망했다. 말았다.LanFang Republic으로 알려졌던 이 공화국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전통은 끊이지 않고 오늘에도 이어져 현재 그곳에 거주하는 객가 사람들의 수는 약 20만 명에 달한다.

객가 사람들의 주거 양식은 독특하기로 유명하다. 보통 토루(土樓), 위옥(圍屋), 또는 위룡옥(圍龍屋)이라 부르는 이들의 전통 주택은 많게는 800명 정도가 함께 들어 사는 초대형이다. 원형이 위주지만 반원형, 또는 장방형 등 모양은 다양하다. 커다란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주거공간을 만들어 살았다. 요즘은 이들 주택이 많은 관광객을 부르고 있을 정도로 독특함을 자랑한다.

이들의 주거 양식을 보면서 외부 요소에게는 담을 쌓아 그들을 막아내 자신의 안전을 강하게 지키려는 면모를 읽는다. 마치 중국 한족의 디아스포라(Diaspora)가 만들어 낸 동양식 게토(getto)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들의 독특한 주거 형태는 미소 냉전 시기인 1960년대 말 에피소드를 하나 낳았다. 군사위성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던 무렵에 이곳을 공중에서 촬영한 미국이 크게 놀랐다는 얘기다. 복건과 광동, 강서 등 세 지역이 합쳐지는 지역 일대에 약 2만 4000채의 객가 주택을 들여다본 미국인들이 ‘혹시, 중국이 핵시설을 완성한 것 아닐까?’라는 의심을 품었다는 내용이다. 복건성에 남아 있는 이들의 토루 등은 2008년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랐다.

객가(客家)는 이름 자체에서 풍기듯이 스스로를 주인이 아니라 손(客)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객가 사람들의 의식 속에는 중심, 또는 중앙을 향한 동경이 숨어 있다. 아울러 그로부터 전해지는 압력이나 제재에 대한 저항의 마인드도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객가는 사회참여에 관한 의식이 높은 편이다.

광동성의 핵심을 이루는 광부문화의 사람들이 사회적 참여보다는 장사를 통한 부의 축적, 이재 등에 집중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던 점과는 대조를 이루는 대목이다.

길게는 1700년 전부터, 짧게는 200~300년 전까지 전쟁과 재난, 그리고 정권의 핍박을 받아 남으로 내려온 그들이다. 송나라 말기에는 몽골족의 원나라에 저항했고, 명나라 말기에는 만주족의 청나라에 저항했다. 청나라 후반에 들어서는 태평천국의 난을 직접 일으키기도 했다.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내전에서는 공산 측의 홍군(紅軍)에 가담해 주축을 형성하기도 했다.

태평천국의 주역 홍수전(洪秀全), 공산당 홍군(紅軍)의 최고 지휘관 주덕(朱德)이 모두 객가 사람이었다. 다른 한족 사람들과는 달리 여성의 발을 묶는 전족(纏足)을 하지 않을 정도로 남녀 평등사상이 남달랐던 사람들이었다. 오늘도 객가 사람들은 중국 문명의 주역으로 자리 잡기 위해 중국과 해외의 여러 나라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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