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07 14:22
중국 개혁개방의 첫 신호탄을 올린 광동성 남단의 심천 특구 모습이다. 광동 상인그룹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중국 개혁개방의 흐름을 앞에서 열어갔다. <사진=조용철 전 중앙일보 기자>

우리는 흔히 중국 사람들을 속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다. 일부에서는 중국 사람들을 알면 알수록 더 미궁에 빠져드는 듯한 느낌 때문에 이들을 양파에 비유하기도 한다. 양파 껍질을 까고 또 까도 속이 잘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20세기 초 영국의 주 인도 총독과 외무장관을 지냈던 조지 커슨(George Nathaniel Curzen 1859-1925)은 “중국은 하나의 대학과도 같다. 학자들은 여기서 영원히 학위를 받지 못할 것이다. 중국을 미화하거나 또는 폄하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외부 사람들에게 중국인들은 퍽 오래 전부터 속내를 파악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도 광동(廣東) 사람들은 미스터리다. 겉과 속을 짐작하기가 다른 지역의 중국인들에 비해서도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 그럴까? 기본적으로 여러 요인들이 있다. 우선 첫 요인은 언어가 무척 복잡해서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이런 말이 곧잘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하늘도 무섭지 않고 땅도 무섭지 않다. 다만 광동사람들이 북경어 하는 게 무서울 뿐이다(天不怕地不怕,最怕廣東人講官話)”.

1992년 북경에서 주재원 생활할 당시의 직접 내가 겪었던 실화다. 어느 금요일 오후, 북경 현지 직원들이 광동성 거래 선으로부터 받은 전화를 두고 그 내용을 전혀 파악할 수 없어 끙끙거리며 앓는 모습을 목격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전화를 대신 받아서 그 광동사람들과 통화한 적이 있었다.

북경 근무 전에 다행히 홍콩에서 1년 반 정도 생활 했기에 그네들의 기본적인 말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직원들은 외국인이 자기들도 모르는 광동어를 한다고 놀라면서 필자에게 남긴 말이 바로 위에서 소개한 “하늘도 무섭지…”다. 아무튼 광동성에서는 국가 표준어인 普通話(푸퉁화) 외에 광동어와 조주어 그리고 객가어 등 외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사람들이 많다.

둘째 요인은 같은 광동 사람일지라도 지역적으로는 매우 다른 기질을 보인다는 점이다. 먼저 눈에 띄는 점은 명분과 실리에 대한 관점 차였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말이 있다.

廣府商人要利不要名,客家人要名不要利,潮汕商人名利雙收。”(광주출신 상인들은 명분 대신 실리를 선호하고, 객가 출신 상인들은 실리 대신 명분을 택한다. 그러나 조주상인들은 명분과 실리를 다 취한다).”

가끔은 광동성 소재 거래 선들과 장사하면서 제품 품질과 납기 등의 문제로 손실 생길 경우가 있다. 그 때마다 상대가 보이는 반응은 지역별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 차이는 명분과 실리를 대하는 각 지역 사람들의 차이에서 비롯할 것이다.

셋째, 같은 광동 사람들이라 해도 이들은 지역별로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사뭇 다른 반응을 보인다. 인문학적인 소양에 있어서도 역시 상당한 차이를 드러낸다. 광주 출신 비즈니스맨, 즉 광부상방(廣府商幫) 거래 선들은 주로 숫자에 퍽 밝다는 인상을 준다. 언어 감각도 뛰어나 비즈니스 거래 때 영어를 많이 사용한다. 아울러 중앙정부의 정책에 무척 민감했다. 그리고 미팅 때 외교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분위기다.

반면 조주와 산터우 출신 비즈니스 글부, 조주상방(潮汕商幫) 거래 선들은 역시 셈에 밝으나 언어 감각은 다소 뒤처진다는 느낌을 준다. 아울러 중앙정부의 정책에 대해 신경을 쓰기보다 그로 인해 생기는 변수를 활용해 가격을 깎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둘 거래 선들 사이에 바로 객가 출신(客家商幫) 거래 선들이 있다. 이들은 무척 많은 유교적인 소양 및 고전에 대한 지식 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편이다. 아울러 해외의 흐름과 유행 등에 상대적으로 많은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중앙정부의 정책을 두고서는 우선 그를 기정사실화한 뒤 극복하는 방법, 즉 대안(對案) 찾기에 열심히 나서는 모습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광주출신과 조주 산토우 출신들이 상업을 중시하는 풍토라고 한다면 객가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문화를 중시하는 편이다. 아마도 이런 출신 별 차이는 바로 각기 다른 역사 지리적 환경을 극복하면서 터득한 것일 것이다.

광동성은 기본적으로 한(漢)나라 때부터 해외 문화를 접촉해 왔으며, 위치적으로도 숱한 외부 문화의 요소가 유입하는 길목에 있었다. 명(明)대 이후 나타난 해금정책(海禁政策: 해상의 교통 ·무역 ·어업 등을 금지했던 정책)의 실시 및 해제 등은 광주출신 상인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시작된 광주 13행 정책(廣州13行)으로 광주 출신 상인(廣府商幫)들은 정부정책에

순응하여 대외 접촉을 하면서 해외 제품의 수입 및 중국제품의 수출 권한을 쥐게 되었고 이로써 외부와의 교류는 크게 넓혀졌다. 여기서 그네들의 개방성과 실리위주의 성격 그리고 중서합일(中西合一;중국과 서양을 합치는)기질이 형성 되었다.

한편 조주상인(潮汕商幫)들은 지리적으로 해양문화와 가까웠음에도 해금정책으로 인해 많은 피해를 보면서 하는 수 없이 정부의 통제를 피해 밀무역을 시작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항상 중앙이 정책을 세우면 대책 마련에 나섰고(上有政策 下有對策), 가장 늦게 광동성에 진입한 객가 출신 상인(客家商幫)들은 정부정책과 지방정부가 내는 대책 사이에서 객가 출신들 사이의 내륙 무역 확대 및 농업을 근간으로 한 터전을 키워오다가 19세기 중반부터는 전란 등을 피해 동남아시아로 떠난다.

광동성에 비록 서로 다른 이질적 문화를 간직한 세 상인 그룹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그들은 전반적으로 해양을 향한 개방적 기질을 지니고 있는 편이다. 아울러 부지런하며 실리적이다. 중국 유일의 국가 방송인 CCTV 대신 홍콩 및 해외의 TV채널을 선호하며, 한류보다는 홍콩 및 대만 드라마를 선호하는 성향을 보인다.

그 뿐 아니다. 이들은 대체로 집안에서 보수적이면서도 외부에 얼나이(二奶:첩을 두는 일) 문화를 퍼뜨리는 대담함도 보인다. 전통 서예 및 광동고전 음악에 열광하면서도 해외의 최신 전자제품 트렌드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는 early adaptor이기도 하다.

1979년 4월 중국 공산당 중앙공작회의가 있었다. 당시 중국공산당 광동성 위원회 지도업무를 맡고 있었던 시중쉰(習仲勳: 현 시진핑 주석의 부친), 양상쿤(楊尚昆)이 중앙에 업무보고 도중 덩샤오핑(鄧小平)은 경제 특구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리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還是辦特區好,過去陝甘寧就是特區嘛, 中央沒有錢,你們自己去搞,殺出一條血路來(역시 특구를 운영하는 게 좋을 것 같네. 과거 섬서성, 감숙성, 녕하성도 특구 였거든, 대신 중앙에 돈이 없으니

당신들이 알아서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출구를 마련해보게나)!” 이때 확정된 4대 특구(심천, 산토우, 주해, 샤먼)중 3군데가 다 광동성이었다.

반세기가 지난 2016년 현재 광동성은 중국내 기업가들이 본사를 제일 많이 설립한 곳이다. 덩샤오핑의 “不管黑貓白貓,捉到老鼠就是好貓(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는 고양이가 바로 좋은 고양이)”의 발언에서 나온 이른바 ‘黑貓白貓論(흑묘백묘론)’은 중국인들이 광동성을 바라볼 때 늘 그 성과를 인정하며 떠올리는 말처럼 변했다. 아울러 광동을 선두로 한 개혁개방의 흐름은 현대 중국의 변치 않는 기조로 작용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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