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14 15:53
대만 에버그린 그룹의 총재였던 장룽파(張榮發). 그는 늘 먼 바다로 나아가길 주저하지 않던 해양업계의 거두였다. 끊임 없는 개척정신으로 바다와 공중에서 세계적인 운송망을 구축했다.

“水能載舟,亦能覆舟(물은 배를 태울 수도 있고 배를 엎을 수도 있다)”는 말이 있다. 《荀子·王制篇(순자 왕제편)》에 나온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庶人安政,然後君子安位。傳曰:‘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水則覆舟(백성이 정치에 안주한 후 제왕의 자리가 안정된다. 제왕이 배라고 하면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고 물은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2016년 1월 16일 중국 공산당 중앙 대만 판공실 책임자가 대만 총통 선거결과에서 민진당의 차이잉원(蔡英文)후보가 국민당의 주리룬(朱立倫)후보를 누르고 총통에 선출된 뒤 대만을 향해서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대만에서 물을 바탕으로 기업을 일으켜 해양왕국을 만들었고, 이제 그를 기반으로 항공왕국을 만든 이가 있었다. 바로 대만 에버그린그룹(長榮集團)의 회장 장룽파(張榮發)회장이다. 장롱파는 일반적인 기업가가 아니다. 우선 필자가 주목하는 점은 그는 철저한 해양인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마도로스(Matroos)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원양어선을 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나 그 어원을 따지면 네덜란드어의 matroos에서 나왔는데, 그 말은 네덜란드어로 "야생장미 뿌리"라는 뜻이라 한다.

야생장미 뿌리가 왜 외항 선원이 되었을까? 이 야생장미 뿌리는 담배 파이프의 재료로 사용되었고 늘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는 사람들은 원양어선 선원이었기 때문에 마도로스하면 원양어선을 타는 사람들 또는 선원(Sailor)을 떠올렸다고 한다.

장룽파는 마치 장미뿌리처럼 단단하고 강한 마도로스다. 자신도 이렇게 말했다. “全家都是海運人,我是爲海而生,大海就是我的生命(우리 집은 모두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바다로 인해서 살고 있고, 바다는 나의 생명이야)”라고 말이다.

원래 대만 팽호(澎湖)열도에서 우체부를 하던 아버지의 3남으로 태어났는데,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이란현(宜蘭縣) 쑤아오(蘇澳)에서 일본 선사에 목수로 취직해 배를 탔다고 한다. 이후 창룽파가 18세였던 1942년 그의 아버지는 미군의 폭격으로 숨을 거둔다.

창룽파는 17세에 귀주환(貴州丸)이라는 배의 견습생이 되면서부터 맨 밑바닥의 견습생에서 시작해 1등 항해사까지 할 정도로 배에 미쳤고, 그저 한 동안을 배 위에서 살았다. 그는 배를 타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았고 항상 먼 항로, 또는 상품성은 있지만 위험한 항로 개발에 집착했다.

15년 간의 항해 생활을 마치고 1961년 처음으로 신대해운(新台海運)이라는 회사를 세워 다른 파트너와 동업한 적이 있다. 대만에서 일본으로 바나나를 운송하는 일이었는데, 일감은 제법 괜찮았다. 그러나 창룽파는 늘 근거리 해운 대신 원양해운을 고집하면서 결국 동업을 포기하고 만다. 1965년 다른 파트너와 중앙해운(中央海運)을 설립했는데, 역시 3년 만에 회사를 접고 말았다.

1968년 9월 1일 40명의 직원과 15년 된 중고선 한 척(Central Trust:長信輪)을 거느린 채 에버그린해운(長榮海運)이란 회사를 연다. 그럼에도 그는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는 마도로스임을 자부했다.

그가 에버그린 해운을 창업할 당시 1967년에 발생한 중동 제3차 전쟁(1967년 6월 5일~6월 10일)으로 전 세계 어느 라인도 중동 쪽으로 운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장룽파는 달랐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중동이라는 힘든 항로를 오가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그가 창업한 사실을 안 마루베니 상사도 당시 늘어만 가는 일본의 수출 화물을 전 세계로 운송할 수 있는 강대한 선단을 갖춘 협조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결국 다년간의 수소문 끝에 잠재력이 있고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 바로 장룽파를 꼽았다.

곧이어 마루베니는 1969년 새로운 소화해운(昭和海運)의 벌크 선박의 운영을 그에게 맡긴다. 이름도 長隆輪(Ever Glory)로 바꾼다. 다시 같은 방식으로 長島輪(Ever Island), 長邦輪(Ever State)을 그에게 맡기면서 세계를 향한 수출화물의 출로를 개척해 나간다.

그러나 1969년은 장룽파에게 무척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모두 3척의 배들이 사고가 나거나 고장 등으로 긴급 회전 자금이 필요해진다. 일본 마루베니 상사(丸紅商事)에서는 곧 그가 필요로 하는 30만 달러를 조달해 준다. 게다가 6개월 후에 재차 30만 달러, 총 60만 달러를 5년 후부터 갚는 조건으로 대출해줬다. 장룽파는 1970년 3척의 선박을 구입하여 중동라인을 강화하고 1년 만에 60만 달러를 다 갚는다.

그의 도전은 중동 항로와 중남미 항로에 멈추지 않았다. 1970년 초 당시 아시아 지역의 모든 해운은 다 벌크 선이었다. 1970~1975년 사이 모든 바이어와 셀러에게 문의해 컨테이너 선박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그는 100만 달러를 투자해 20대의 컨테이너 선박을 주문한다.

1975년 컨테이너 선박 부족 현상이 발생하자 에버그린 해운은 거대한 컨테이너 선단을 거느리고 세계를 누비며 컨테이너 선사 업계의 독보적인 위치에 올라선다. 창업한 지 17년만인 1985년 에버그린 해운은 컨테이너 선사업계의 1위를 차지한다.

2014년 현재 기준 에버그린 라인은 176척의 거대 선박단과 166곳의 지사를 이끄는 세계 4대 선사로 도약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장룽파는 해운업계의 전 세계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각국 정상들과의 교류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에게는 ‘대만 외교정책의 숨은 실세’라는 평이 따른다.

그가 구축한 외국 정상과의 교류는 찬란하다. 영국 전 총리 대처 여사, 벨기에 전임 국왕 알베르 2세, 파나마의 전 대통령 모스코소가 그와 ‘절친’이었다. 그밖에 독일, 프랑스, 영국, 미국, 캐나다, 이탈리아 등 전 세계 전 현직 정치인과 상공업계인도 다 그의 인맥 네트워크에 이름을 올릴 정도다. 대처 전 영국 총리의 경우 늘 개인 서신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다.

장룽파는 1988년 9월 1일 에버그린 해운 창립 20주년을 맞아 항공업계 진출 선언을 한다. 해운에서 항공으로의 비상(飛翔)을 선언한 것이다. 2년 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1991년 7월 1일 첫 비행기를 띄운다. 2016년 현재 EVA AIR(長榮航空)는 66대 비행기를 구비하고 있으며, 별도로 추가주문을 59대 해놓은 상태다. 유럽과 미주를 포함한 전 세계 66군데 도시에 기항 중이다.

1992년 장룽파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다.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 중국진출 및 투자를 약속한다. 1994년 녕파(寧波 닝보)를 시작으로, 청도(靑島)와 상해(上海), 광주(廣州) 등 부두의 컨테이너 항만에 8000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1992년부터 1997년까지 총 4차례에 걸쳐 당시 장쩌민(江澤民) 총서기와도 만나 대만과 중국 최고위층간 연락을 주선하기도 했다.

그 후 10여 년 간의 주선과 노력 끝에 2008년도 12월 15일에는 중국의 북경(北京), 천진(天津), 상해(上海), 복주(福州), 심천과 대만의 타이페이(臺北), 가오슝(高雄), 지룽(基隆)을 잇는 해상 및 우편물 직통을 기념하는 경축의식을 벌인다.

장룽파는 이 날 EVA Line소속의 747-400 여객기에 올라타 타이베이 타우웬(桃園)을 이륙하여 상해 푸둥(浦東) 국제공항을 향한다. 대만과 중국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던 전면적이고 직접적인 상호간의 삼통(三通:通郵,通航,通商)의 숨은 조력자 자격이었다.

2016년 1월 20일 11시 5분 장룽파는 타이베이 저택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후계구도 문제와 여러 산적한 문제를 놔두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향해 새로운 곳으로 이륙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받은 훈장을 뒤로 한 채로 말이다. 장롱파는 대만의 동부 지역인 이란 쑤아오라는 곳에서 태어났지만 본인은 늘 스스로를 대만 북부의 지룽(基隆)사람이라고 말했다.

스스로를 늘 먼 바다에 나가 떠도는 사람, 마도로스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에서 죽는 사람으로 봤던 셈이다. 마도로스는 바다를 생활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이다. 따라서 한 곳에 머물러야 하는 정처(定處)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이다.

중국 동남부를 원래의 생활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이 대개 그렇다. 그 역시 중국 동남부 푸젠(福建)을 터전으로 삼아 거주하다가 대만으로 이주한 객가의 후손이다. 흔히 그런 이들을 福佬客(중국 복건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와 동화된 客家)라고 적는다.

이들은 어쩌면 사람이 굳건히 발을 디딜 수 있는 큰 땅, 대륙을 고향으로 상정하지 않았던 존재다. 그보다는 항상 먼 바다를 응시하는 사람들이다. 바다로 거침없이 나아가 더 넓은 경계를 개척하는 사람들이라는 얘기다. 장룽파의 일생이 그렇다. 그는 역시 다른 동남부 사람들처럼 먼 바다에 주저 없이 나아갔고, 세계의 해양인들과 견줄 만큼 큰 바다를 열었다.

우리가 중국에 주목하는 점은 바로 이런 역동성이다.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고, 보다 더 넓은 곳을 주시하며, 제 몸을 더 크고 광대한 곳에 들여 더 많은 것을 이뤄내는 힘이다. 중국남부를 거닐면서 늘 간과할 수 없는 그런 역동성에 나는 늘 주목한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은 상당 부분 이런 남부의 역동성에 힘입어 지금의 큰 성취로 이어졌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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