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3.22 11:20
1958년 대만 금문도와 중국 복건 사이에 벌어진 포격전 장면이다. 대륙과 바짝 붙어 있는 금문도를 빼앗기 위해 중국이 공격을 시도하면서 번진 격렬했던 싸움이었다. <사진=라이프>

최신 중국어에 하이파이(海派), 하이구이(海龜), 하이어우(海鷗), 하이다이(海帶), 하이짜오(海藻), 하이셴(海鮮)이라는 표현들이 생겼다. 이는 바다에 사는 바다거북이, 바다 갈매기, 다시마, 해조류, 해물 등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시사의 흐름에 따라 생겨난 새 조어에 해당한다. 하이파이(海派)는 해외 유학파들을 지칭하는 말이고 하이구이(海龜)는 거북이 龜(구)와 돌아올 歸(귀)가 같은 음이라는 점을 이용해 해외에서 돌아와 그나마 출세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유학파들이 적었을 적에는 이를 별도로 ‘드물다(鮮)’라는 표현을 빌려 하이셴(海鮮)이라고 하기도 했다. 하이어우(海鷗)는 갈매기에서 유래해서 미국과 중국을 오가는 유학파출신들을 일컫는다. 특히 두 나라를 오가면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루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하이다이(海帶)는 우리말로 직접 옮기면 ‘다시마’에 해당한다. 중국 출신들인 투비에(土鱉: 토종 거북이, 국내파를 지칭)와 경쟁하는 유학파들을 말한다. 국내파와 경쟁하다 뒤쳐진 해외 유학파들은 뿌리 없이 바다 이곳저곳을 떠돌아 다니는 해조류, 하이짜오(海藻)라고 표현한다. 이런 용어들은 주로 1980년대 초기에 시작된 미국 및 유럽 지역의 유학파들이 귀국하면서 생긴 말이다.

오늘은 어느 하이셴(海鮮), 하이구이(海龜)로 대표되는 어느 대만계 중국인의 기구한 인생 이야기를 소개한다. 대만에서 1952년10월 15일 객가(客家)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이름은 임정의(林正義)라고 한다. 어려서부터 집안이 가난해 모친은 남의 옷을 빨아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집안이다.

그는 어려운 집안에서 자라났지만, 대학시험을 치르고서는 대만 최고 명문 대만대학교 농과대학 농업 엔지니어링 수리팀에 합격한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과 매우 친화적인 사람이었고, 이름과 같이 무척 정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타입의 학생이었다. 1학년 때 마침 대만이 유엔에서 탈퇴했고, 학생 임정의는 1학년 학생회장을 맡았다.

1971년 당시 중국인민공화국이 UN에 가입하는 분위기 속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막자고 데모를 벌이는 일이 당시 대만에서는 매우 일반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민주 권리 쟁취라는 나름의 큰 목표를 위해 단식을 할 정도로 민주화를 이루려는 신념이 더 강했던 학생이었다.

1971년 겨울 1학년 1학기 말에 임정의는 성공령(成功嶺; 단기 대학생 군사훈련소)에서 군사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시작한 지 약 4~5주 지났을 때 분대장 소대장에게 보고하여 군사 훈련 후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군에 입대를 하겠다고 지원했다.

당시 대만 대학생들의 가장 대중적인 바람은 미국 유학이었다. 따라서 임정의와 같이 학교를 포기하고 군에 남겠다고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엘리트 젊은 세대를 원하고 있던 군대 측에서는 무척 훌륭한 선전거리에 해당했다. 군에서는 그를 받아들인 뒤 스타로 만들어버렸다. 여러 대학생들이 그의 뒤를 따라서 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만의 육군 참모총장인 뢰명탕(賴名湯 라이밍탕)은 장경국(蔣經國) 행정원장(우리의 국무총리에 해당)을 대신해 1972년 3월 4일 임정의에게 우수 청년상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임정의 학생은 참모총장에게 학교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육군 사관학교에 진학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3년 뒤인 1975년 임정의 학생은 전교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44기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뒤 임정의는 학교에 연대장으로 배속 되었고 곧이어 대만 정치 대학교 중문과를 졸업한 첸윈잉(陳雲英)과 결혼하여 아들을 얻는다. 당시의 대만 분위기는 대륙출신들보다는 국가에 충성하는 대만 출신 엘리트들을 국민당 산하에서 키우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대만대학교를 중퇴하고 육사를 졸업한 임정의는 장경국 행정원장의 특별한 배려를 받는다.

야전군으로 배속 되지 않고 군인 신분으로 대만 정치 대학교 기업관리 연구소(우리의 대학원에 해당)로 진학해 석사과정을 밟도록 해준다. 1979년 1월 1일자로 드디어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의 정식 외교관계 수립이 공식화한다.

1979년 2월 16일 임정의는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선인 금문(金門 진먼) 방위사령부 284사단 마산(馬山) 중대 중대장으로 배속된다. 직급은 상위(上尉: 중위와 대위사이의 계급)였다. 마산(馬山)이라는 지역은 금문도(金門島 진먼다오)의 동북쪽에 있는 최전선 섬 중에서도 가장 일선이었다. 중국의 인민해방군 거점과의 거리가 2㎞에 불과했다.

이곳은 특히 바다 건너편인 복건(福建)성 인민해방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에 늘 전선 시찰을 온 장관들과 외빈들을 맞이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기에 마산은 일반적인 신분에 있는 장병으로는 배속받기 어려운 곳이었다. 사상과 신분이 반드시 믿을 수 있는 사람만이 이곳에 배치를 받았다.

여기까지의 임정의는 민주권리 쟁취를 위한 학생이 군사 훈련에 참여한 뒤 복학 하지 않고 육군 사관학교를 나와 정부 최고위층의 배려 아래 일선에 섰던 대만의 가장 충직한 군인이었다. 아울러 그의 장래는 매우 밝았다. 엘리트 코스를 따라 조용히 성장하면 어느 순간에 그는 대만사회의 정점에 설 수도 있었다. 그러나나 그는 반전을 일으킨다.

1979년 5월 16일 저녁 임정의 상위는 농구공을 안고 2㎞를 헤엄쳐서 건너편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월경한다. 대만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 장교가 갑자기 전선을 넘어 적의 진지로 귀순한 것이다. 살벌한 비무장지대(DMZ)를 건넌 대한민국의 엘리트 장교가 공산주의 북한으로 갑자기 넘어간 경우랄 수 있었다. 그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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