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04.14 16:01
베이징 천안문 광장의 모습이다. 베이징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임은 보이지 않는다. 각지에서 올라온 내지 관광객들이 광장을 차지한 지 오래다. <사진=조용철 전 중앙일보 기자>

최근 프랑스 여러 도시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서 난리다. AP 통신에 따르면 지난 4월 9일 파리 및 낭트렌 등 200여 도시에서 12만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벌인 이유는 올랑드 대통령이 추진하고 있는 친 기업적인 노동법 개정안에 반대하기 위해서다.

프랑스 전체 실업률이 10%정도에 이르자 프랑스 정부는 노동시장을 유연화하기 위해 직원 해고 요건을 완화했다. 또 연장 근로 수당을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올랑드 대통령의 이러한 정책에 시민들이 반기를 들어 시위가 번졌던 것이다. 올랑드 대통령의 친 기업적인 노동법 개혁 정책에 반기를 든 이들은 3월 31일부터 파리의 레퓌블리크(공화국)광장에 모여들어 매일 ‘뉘드부’라고 하는 밤샘 시위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광장이라는 개념은 원래 그리스의 아고라(Agora)와 로마의 포럼(Forum)에서 나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주장 또는 철학적인 논제를 두고 시민들에게 역설하는 토론의 장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이나 황제를 기리는 곳, 또는 종교적인 의미의 성스런 장소로 의미가 번졌다.

그런 이유 때문에 모든 광장에는 스토리가 따라다닌다. 따라서 스토리가 없는 광장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통치자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든, 아니면 시민들의 수요에 의해 들어섰든지 광장은 어쨌든 스토리가 들어서는 인생의 큰 무대다.

중국에도 수많은 광장이 있다. 1949년 10월 1일 당시 모택동(毛澤東)이 중화인민 공화국 건립을 선포했고, 1966년 8월 18일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경축 군중대회’가 열려 100만의 홍위병(紅衛兵)이 모였던 천안문 광장 또한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도시화가 펼쳐짐에 따라 중국의 거의 모든 도시에는 ‘인민 광장’이 생겨났다. 이들 광장에서는 관주도의 각종 규탄 모임이나 경축 모임이 열린다. 그와 함께 시민들도 몰린다. 제기차기, 장기 두기, 심지어는 아줌마들이 모여 집단으로 군무(群舞)를 추는 大媽舞(대마무)의 ‘장관’이 펼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100년 전, 200년 전의 중국 광장 모습은 사뭇 달랐다. 과거 중국의 광장 문화는 대개가 절 앞의 공터, 시장과 거리에 난 큰 마당, 우물가 주변의 널따란 장소 등에서 펼쳐졌다. 저녁내기 장기 게임, 시국을 논하다 서로 얽혀 벌이는 싸움질, 엿판에서 벌이는 장사꾼과의 사소한 다툼, 지나가는 아낙네를 지긋이 바라보는 어느 짐꾼의 시선 등이 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풍경이었다. 북송(北宋)시대의 화가 장택단(張擇端)이 그린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에 등장하는 중국 옛 광장문화의 그윽한 모습이다.

로마에 갈 때 항상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캄피 돌리오 언덕에 있는 캄피 돌리오 광장과 나보나 광장, 그리고 바티칸의 마르코 광장을 연상시키는 포플로 광장,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오드리 햅번이 아이스크림을 먹어 유명해진 스페인 광장 등 4대 광장이다.

광장은 대부분 통치자가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도시인들의 각종 스토리가 얽혀 있다. 그리스와 로마, 프랑스의 나폴레옹 시대에 그랬고, 통치 기간 중 제일 많은 광장을 만들어냈다는 히틀러 시대에도 그랬다.

절대적인 1인자 자리에 올라 거대한 중국을 다스렸던 모택동이 예외일 리가 없다. 그러나 시민들의 목소리는 점차 중국의 광장으로부터 사라져 간다. 1989년 초여름, 천안문에서 시민들의 목소리가 광장에서 울린 적은 있었으나 이제는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지방에서 상경해 게릴라 데모에 참가한 중국 지방 서민들의 하소연은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압도당한 지 이미 오래다. 이들 지방 서민들은 지방 관료의 부패, 제게 가해진 억울한 사연을 폭로하며 울분을 토로했던 일로 유명했다.

중국의 품으로 돌아온 지 19년째인 홍콩의 광장도 사정은 대개 비슷하다. 1주일 중 6일 동안 홍콩의 가정이나 상점 등에서 부지런히 일하다가 주말 하루를 쉬기 위해 나온 동남아시아 계통 헬퍼들의 애환이 중국을 향한 홍콩 시민들의 울분을 대체한 지 오래다. 홍콩 시민들은 광장을 떠나 센트럴이라는 거리로 나서기 시작했고, 급기야 몽콕이라는 중심가를 점령하기도 했다. 어쩌면 원래 중국과 홍콩 시민들은 예전 광장 문화의 근거지인 저자거리로 돌아간 셈일지도 모르겠다.

최인훈의 <광장>이라는 소설에는 남쪽의 ‘밀실’을 떠나 북녘의 ‘광장’으로 건너간 주인공 이명준의 이야기가 나온다. 북의 광장에 실망하고 남의 밀실로부터의 받은 허망함을 채울 수 없던 이명준은 인민군 포로 신분으로 잡힌 뒤 새로운 곳을 찾아 나선다.

남의 밀실과 북의 광장을 다 마다한 채 인도 국적의 타고르 호를 타고 제 3국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물론 이틀간의 여행 뒤 그는 결국 바다에 몸을 던진다. 이명준이 원했던 광장은 자유로운 소통의 장소였던 것이다. 밀실 문화가 갖고 있는 자신만의 내밀한 삶의 문화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광장과 함께 밀실도 나타난다. 온 오프 라인에서 모두 광장과 밀실이 필요해진 것이다. 진정한 광장은 큰 면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복판에 오벨리스크나 무명용사 기념비 같은 상징적인 건축물도 필요 없다.

정작 필요한 게 있다. 광장에 모이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쉴 수 있는 공간과 숲으로 어우러진 자연 환경, 그리고 그 안에서 서로 자유롭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분위기다. 그런 조건이 갖춰진 광장에서 사람들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정한 광장의 문화를 이룰 수 있다.

지난 3월 6일 중국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인 쉬사오스(徐紹史)는 국무원 신문판공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올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목표치를 6.5~7.0%로 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중국 경제는 ‘신창타이(新常態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며 “이는 (성장)속도변화, (경제)구조 고도화, (성장)동력 전환 등 세 가지 핵심 내용을 담고 있다”고 부연 설명까지 했다.

요즘 중국 각지의 시청 주변에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민 광장이 늘어만 가고 있다. 또한 광장이란 용어가 이젠 심지어 쇼핑 아케이드의 대명사로까지 번지고 있다. 규모와 형식에서는 대단하다. 미국과 패권을 다투는 경제적인 G2의 반열에 오른 중국의 힘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중국의 광장 문화는 오히려 각지의 공원 및 저자 거리, 그리고 골목길로 향하고 있다. 기묘한 불일치의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더 넓은 곳에서 사람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의견을 발표하며, 그 의견을 서로 더 성숙시키는 광장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게 현실이다. 신창타이 시대의 바람직한 중국의 광장 문화는 무엇일까. 나는 솔직히 그 점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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