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05 16:08

[뉴스웍스=유광종기자] 528년 전 제주 앞바다에서 표류해 머나먼 중국 저장 싼먼에 표착한 조선의 선비 최부는 지금 시각에서 볼 때 매우 특별했다. 죽음 앞에서도 제 소신을 결코 굽히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표류 뒤 처음 뭍에 올라 들었던 마을, 지금 이름 훙먀오(紅廟)촌의 모습이다. 지난 8월 초 이곳을 들렀을 때 현지의 많은 사람들이 “500년 전 이곳을 들렀던 사람의 후손들이 왔다”며 반겨줬다. 더운 날씨에 목이 마른 한국 방문단 일행을 위해 수박을 잘라다 주기도 했다. 최부는 이곳에서 현지 주민들로부터 왜구로 의심을 받기도 했다. 일행 43명은 자칫 주민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부는 일행에게 “현지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모두 꿇어 앉아 있다가 주민들과 말을 할 경우에는 반드시 일어나 읍(揖)을 하며 응대하라”고 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도 예(禮)를 갖추자는 얘기였다. 번거롭지만 일행은 최부의 지시르를 따랐다. 그 때문에 현지 사람들은 이들을 문화와 그 소양을 갖춘 사람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왜구라는 의심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최부가 다음 들렀던 곳이 지금은 푸펑(蒲峰)촌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최부가 목격했던 당시의 옛 사찰도 그대로였다. 단지 일부가 무너졌고, 본채인 사당(祠堂)만 그대로다. 오랜 풍상을 겪었으나 최부 일행의 자취를 아스라이 떠올릴 정도로 건물은 고색이 창연했다. 최부는 이곳에서 현지의 한 선비와 필담을 나눴다. 여전히 조선선비로서의 단아함과 꿋꿋함 등을 잃지 않았다. 중국 관원 일부가 이곳으로 최부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달려오는 상황이기도 했다.

 

최부 일행이 들렀던 푸펑 마을의 주민들이 한국인 방문단을 반갑게 맞아줬다. 이들은 “인연이 있으면 천리 바깥에서도 달려와 만난다”면서 덕담을 건넸다. 500여 년 전 이곳을 들렀던 최부의 일행과 우리 방문단, 그리고 현지의 인연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얘기였다. 최부 일행은 이곳에서도 왜구라는 의심을 벗지 못했다. 분위기는 때로 험악해지기도 했다. 최부 일행은 이 마을을 떠나 선암(仙巖) 마을을 지나면서 주민들로부터 혹독한 대접을 받았다. 물건을 빼앗기기도 했다. 최부는 이 사실을 관원들과의 대화에서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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