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9.19 10:32
베이징 자금성의 구석에 만들어진 각루(角樓)의 모습이다. 자금성은 황제의 길인 황도를 축으로 설계했다. 그 축선을 중심과 주변, 안정과 수렴의 틀로 삼는 게 특징이다.

베이징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이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금성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옛날 황제들이 제법 그럴 듯하게 살았군!”이라며 단순한 감탄만을 할 대목이 아니다. 통치의 근간을 초장(超長)의 축선으로 세우고 정통의 근간을 만들어 명분을 제대로 일으킴으로써 드넓은 대륙을 이끌려고 했던 축선의 설계, 또는 그 안에 담긴 방략(方略)의 무게를 느끼는 게 필요하다.

축선은 결코 옛날의 일만은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세상을 뜬 뒤 그 시신을 축선의 ‘포장재’로 활용하고 있다. 천안문 광장 남쪽에 있는 마오쩌둥 기념관이 바로 그 포인트다. 왜 세상을 떠난 지도자의 시신을 이 축선의 복판에 올려놓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 천안문 광장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그의 초상은 또 어떤가.

마오쩌둥에 관한 시비는 오늘의 중국에서도 뜨거운 이슈다. 그는 과격한 좌파주의 실험인 문화대혁명을 일으켜 재난에 가까운 상황을 중국 전역에서 연출했다. 그에 앞서서는 더 극좌적인 실험인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을 벌여 적어도 3000만 명의 인구를 굶주림에 시달리다 죽게 만들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의 대형 초상은 오늘도 천안문 가운데에 걸려 있고, 그의 시신은 ‘죽어서는 흙에 들어서야 편안해진다’는 중국 전통의 ‘入土爲安(입토위안)’ 식 관념을 외면한 채 광장의 남단인 기념관 복판에 놓여 있다. 왕조 시절 황제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했던 전통의 축선에 그의 초상이 걸리고, 다시 그의 시신까지 놓인 이유는 무엇일까.

중국 공산당은 공산당이다. 공산당이 공산주의 이념을 무시해서는 더 이상 공산당이 아니다. 그럼에도 중국은 경제적 발전이 필요했다. 사회주의 종주국 옛 소련은 먼저 무너지고 말았다. 여러 관점의 분석과 해석이 등장할 수 있지만, 현실적인 토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는 여러 조건의 ‘수용(受容)’과 ‘응용(應用)’에서 옛 소련이 실패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런 옛 소련이 경제적 발전을 위해 변화를 꾀했다면 어떤 방향이 있을 수 있었을까. 제 몸체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요소를 받아들이는 일 말이다. 어쨌거나 옛 소련, 지금의 러시아는 그런 ‘변용(變容)’을 꿈꾸지 못했다. 꿈을 꾸지 못했으니 실행을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그런 일이 가능했다. 사회주의 몸체를 유지하면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요소를 접목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체질을 바꾸면서도 얼굴은 그대로 가져가는 ‘변신(變身)’에서 중국은 성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필자의 눈에는 중국이 정치적 축선을 제대로 지키면서 활용하는 방안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축선이 뚜렷하면 자신이 지닌 가장 중요한 토대를 잃지 않는 법이다. 핵심이 분명하면 주변의 여러 가지 환경들을 현실에 맞게 변형하면서도 틀을 유지할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해야 건축의 외형이 번듯해지며, 아울러 초석(礎石)이 든든하면 다른 여러 가지를 환경에 맞게 변형할 수도 있다. 중국은 그런 기초와 초석의 다지기에 모두 능한 편이다. 나라와 국가의 지향이 분명한 정치적 축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보다 실용주의적이며, 보다 현실주의적이다. 중국의 면모가 그렇다. 현실에서 자신의 지향을 펼칠 수 있는 강력한 중심지대를 먼저 확보한 뒤 그를 통해 주변의 여러 변수(變數)를 수용하는 전략의 틀이 그들에게는 보인다. 아마 그런 장치의 으뜸이 어쩌면 베이징에서 우리가 목격할 수 있는 축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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