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10.07 17:11
전국시대 박애주의의 사상을 전파한 묵자(墨子)의 상상 그림이다. 산둥(山東)은 공자와 맹자, 손자와 묵자 등 사람으로서는 최고 존칭인 '~자(子)'로 불렸던 천재적 사상가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그 점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산둥은 어딘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한반도의 태안반도와 중국의 산둥 반도는 지리적으로 매우 가깝다. 오죽하면 서산이나 당진에서 건너편 산둥의 닭이 울음 우는 소리가 들린다고 허풍까지 놨을까. 지리적으로 근접하면 사람의 발길도 잦아진다. 산둥은 한반도와의 인접성 때문에 고래로 한반도 사람들의 발길이 부지런히 이어진 곳이기도 하다.
또 다른 의미에서 산둥이 어딘가 모르게 한반도 사람들에게 친숙해 보이는 요소가 있다. 바로 ‘동이(東夷)’ 때문이다. 한반도의 혈계(血系)를 문명적 요소로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분류 개념의 하나다. 동북아시아의 원래 민족 구성을 설명할 때 이 동이는 반드시 등장한다. 중국 화북(華北)의 동쪽 지대, 그리고 만주가 펼쳐지는 동북(東北), 나아가 한반도를 구성하는 주민들의 대개가 여기에 속한다는 설이 있다.

중국의 문명적 요소를 이야기할 때 등장하는 이 동이의 문화는 그 구성 상 매우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중국 문명의 새벽에 활동했던 여러 세력 중 이 동이의 활동과 기여는 중국이라는 문명 발전사를 이야기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7000년 전인 신석기(新石器) 말의 여러 흔적들은 그 이후 등장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현재 중국 구성체의 직접적인 뿌리다. 그 신석기 시대에 산둥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남긴 흔적은 ‘대신(大辛) 문화’ ‘대문구(大汶口) 문화’ 등의 고고학적 발굴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상태다.

그러나 너무 먼 이야기다. 그보다는 시기를 조금 더 우리 쪽으로 앞당겨서 이야기를 이어가자. 결론적으로, 중국 문명사 속에서 산둥이 뿜어낸 빛줄기는 휘황찬란하다. 우선 중국 문명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는 춘추(春秋 BC770~BC476년)시대의 시야에서 볼 때 이 산둥은 동이의 문화적 토양으로부터 성숙한 나라 제(齊)와 노(魯)나라가 있던 곳이다. 이 점 때문에 산둥의 문화권을 이야기할 때 현대의 중국인들은 ‘제로(齊魯)문화’라는 말을 쓴다.

이 제로문화의 특징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중국의 중요하고 의미 깊은 문화적 맥락은 상당 부분이 바로 이곳에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우선 꼽아볼까. 먼저 공자(孔子)다. 이 사람이 어떤 인물인가를 다시 늘어놓는다면 독자들은 금세 식상해할 것이다. 그 계통을 이어 중국 사상사에서 큰 점을 찍었던 맹자(孟子)도 있다. 그 맹자에 앞서 공자의 후손으로 유학의 사유체계를 튼튼한 궤도에 올린 증자(曾子)도 빼놓을 수 없다.

산둥은 그럼 유학만을 키웠을까. 아니다. 사람 사이의 싸움과 경쟁의 긴장관계를 치밀하게 관찰해 병법(兵法)과 병략(兵略), 나아가 전략(戰略)을 체계화한 희대의 군사사상가(軍事思想家) 손자(孫子)도 이곳 사람이다.

<중국이 두렵지 않은가>, 유광종 저, 도서출판 책밭, 2014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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