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6.11.27 15:51

함경북도 온성으로 재추방...1997년 중국으로 탈북

부모님 가족이 기독교 집안이라는 이유로 평안북도와 평양에서 각각 쫓겨온 양강도 김정숙군(옛 신파군) 개마고원 일대 임업사업소(통나무벌목장)에는 우리 가족들처럼 평양과 개성, 황해도 등지에서 추방돼 온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북한정권은 넘치는 인력을 다시 재조정해 일부는 함경도의 광산과 탄광으로 다시 이주 시켰다. 우리 가족도 필자가 두 살 때 다시 함경북도의 탄광촌으로 재추방 됐다. 온성군은 북한의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는 지역으로 석탄매장량이 풍부해 크고 작은 20여개의 탄광이 있는 곳이다.

아버지 부상으로 탄광촌 벗어나 

필자는 이곳에서 유치원과 인민학교를 다녔고 고등중학교를 졸업했다. 탄광촌의 특성상 북한에서 일반계층(하층민)에 속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그 가운데 1950년 전쟁당시 붙잡혔던 국군포로 가족들과 평양과 각 도시에서 추방돼 온 사람들이 많았다.

탄광은 열악한 석탄생산설비와 전기 부족으로 지하에서 배수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각종 사고가 수시로 일어났으며 그 때마다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며칠에 한번 씩 사망사고가 속출하는 것은 북한의 탄광촌에선 일상으로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가 11살 때 아버지도 버럭더미에 깔리는 사고를 당하고 한쪽 다리를 약간씩 절게 됐으며 이때 사고를 이유로 국영탄광에서 퇴직하고 지역의 작은 탄광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은 북부철도총국에 필요한 석탄을 생산해 공급하는 곳이었다. 이후 우리가족은 열악한 탄광을 피해 북부철도철도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됐다.

탈북을 결심하다

덕분에 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철도에 들어가 일할 수 있게 됐다. 철도에서 일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을 매일 느껴야했던 탄광에서 일하는 것보다 훨씬 좋은 것이었다.

그러다 동유럽 붕괴이후 소련(현재 러시아)의 물자와 자원 지원이 끊기면서 1996년 북한은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시기가 도래했다. 필자는 이 때 탈북을 결심했다.

탈북을 앞두고 부모님을 설득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혼자만 두만강을 건너게 됐다.

1997년 1월 13일 중국의 동북지방과 북한북부지역에는 눈이 강산처럼 쌓였다. 어려서부터 두만강을 낀 온성 땅에서 살다보니 국경경비에 대한 정보는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었기에 강을 건너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필자가 중학시절이었던 1980년대 북한은 정전이 빈번했다. 큰 탄광촌이 불이 꺼지고 나면 온통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저 멀리 중국 도문지방과 훈춘지방의 불빛이 온성 땅에서 환히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 때 머릿속에 자주 떠올렸던 생각은 왜 중국은 불빛이 저토록 환한데 ‘사회주의 지상낙원’으로 선전하는 북한 땅은 이렇게 전기가 자주 끊어질까 하는 생각이었다. 두만강을 건넜던 그날도 정전으로인해 온통 어두워진 그 순간을 이용했다.

필자는 1997년 1월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왔다. 중국에서 6년동안 보내며 가족들을 모두 탈북시켜 남한에 입국할 수 있었다. <사진출처=중국 상하이 푸단대 이창주 외교학박사 블로그>

풍요로왔던 중국에 매료...'가족과 만나다'

중국으로 들어서니 모든 것이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한 겨울철에 미처 거두어들이지 못한 강냉이와 벼를 실어 들이느라 분주하고 여행 다니는 사람들로 기차역은 사람이 발들일 틈이 없이 차고 넘쳤다. 1997년 1월 필자가 듣고 느꼈던 중국은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처참하게 무너질 듯했으나 모택동 사망이후 등소평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완전히 다른 사회를 구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생활은 순조로웠다. 중국 사람들의 도움으로 한국회사에 취직할 수 있게 됐고 신분은 중국 조선족으로 위장할 수 있게 됐다. 몇 년이 지나 한국인 사장이 나의 위장신분을 알게 됐다. 그는 처음부터 북한사람이라는 신분을 자기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는 나를 나무라며 친동생처럼 대해 줬다. 그리고 사장 친구의 도움으로 3년 뒤 북한에 있는 가족들까지 모두 탈북 시킬 수 있었다.

북한을 떠난지 3년 만인 2000년 그리운 가족과 상봉할 수 있었지만 불행하게 아버지가 그동안 세상을 뜨셨다. 지금도 가슴속에 아버지를 일찍 탈북 시키지 못한 죄책감과 북한에 살 때 아버지에게 효를 다하지 못했던 것이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미여질 때가 많다.

엄마와 동생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적응이 끝난 후 가족들 모두 자기의 직업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갈 수 있는 때를 기다리며 일했다. 이후 2005년 동생들은 중국을 떠나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필자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남아의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2006년 한국으로 입국할 수 있었다.

'통일문제' 독자들과 고민하고파 

중국에 살아가는 동안 참으로 잊지 못할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일일이 그들을 다 나열할 수 없지만 항상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살고 있다. 

지금까지 ‘북녁내고향’ 2회에 걸쳐 필자 개인 소개를 했다. 다음 회 부터는 그동안 겪어 왔던 남북한의 모습들을 통해 남북한의 통일과 통합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남북한의 사회상을 통해 느꼈던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필자가 지나 온 개인적인 발걸음들을 세세하게 적지 않은 것은 이 글의 목적이 ‘내’가 아닌 ‘남북한’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남북한 두 체제와 사회의 비교를 통해 통일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독자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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