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28 15:12
지하철 2호선 강변역에서 한강을 바라보면서 촬영한 사진이다. '강변'이라는 단어는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작품에서와 같이 우리에게 특별한 정감을 안겨주는 말이다.

마침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라는 시를 지은이가 김소월인데, 그의 고향이 영변寧邊이다. 요즘은 핵을 개발해 남쪽의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핵 발전 시설 때문에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이곳은 군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우선 이름 자체는 변경(邊)을 편안히 하자(寧)는 뜻이다. 이곳은 철옹성鐵甕城으로 유명하다. 험준한 산세山勢를 따라 만든 방어형 성채가 있었다고 한다.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그에 따라 변경을 제대로 지켜낸다는 뜻을 얻었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는 시구가 나오고, 역시 김소월이 지은 시에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구절이 등장한다. 강변이나 영변이나 모두 邊(변)이라는 글자를 두고 있으니 김소월 시인이 가장자리와 구석진 곳을 일부러 좋아했는지 괜히 궁금해진다.

어쨌든 邊(변)은 가장자리이자, 바깥의 어느 한 쪽을 이루고 있는 선線을 형성하고 있음은 우리가 앞의 예를 들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강의 흐름을 중심으로 하고 볼 때 물 흐름의 양쪽 가장자리가 바로 강변江邊이다. 그러나 강의 둔치를 중심으로 볼 때 물의 흐름과 뭍이 만나는 곳은 안변岸邊이다. 바다를 중심으로 볼 때 뭍과 만나는 곳이 해변海邊이다.

그런 뜻의 펼쳐짐을 거쳐 정착한 새김 중의 하나가 길미, 즉 이자利子일 테다. 따라서 본변本邊이라고 하면 원금과 이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곱으로 쳐서 받는 이자는 갑변甲邊, 헐하게 쳐서 받는 이자는 헐변歇邊, 경변輕邊이라고 했다. 이자 자체를 일컬을 때 쓰는 변리邊利, 부기의 용어로 쓰는 차변借邊 및 대변貸邊 등의 단어가 다 이와 관련이 있다.

변폭邊幅이라는 단어도 제법 흥미를 끈다. 가장자리에 있는 옷감 등을 휘갑쳐서 꾸민 곳이다. 피륙 등의 올이 풀리지 않게 단단하게 잡아 맨 곳이다. 따라서 이는 옷차림 등에서의 정갈함을 따질 때 등장한다. 중국에서는 不修邊幅(불수변폭)이라고 적는 성어가 있다. 옷 매무새 등을 잘 만지지 않고 대충 입는 사람, 제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 나아가 건달과 같은 이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하나의 한자에 그렇게 많은 단어가 따른다. 그 얘기도 끝이 없다. 이 邊(변)이라는 글자가 들어가면서 직접 ‘끝’을 얘기하려는 단어가 있다. 邊際(변제)다. 어떤 물체나 형상 등이 서로 맞물리는 곳 정도로 풀 수 있는 말이다. 하늘과 땅이 닿는 곳, 저 멀리의 지평선이 하늘과 물리는 곳, 그런 게 바로 邊際(변제)다. 따라서 無邊(무변)이라고 적으면 끝이 없다는 뜻이다.

광대무변廣大無邊이라고 하면 넓고(廣) 커서(大) 끝(邊)이 없다(無)의 엮음이다. 우주宇宙가 바로 그렇다. 공간을 일컫는 宇(우)와 시간을 일컫는 宙(주)가 만나 이뤄지는 게 宇宙(우주)다. 동서남북과 아래 위의 공간적 크기, 예와 지금의 고금古今을 가리키는 시간의 장구함이 합쳐진 단어다. 그야말로 가없어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끝이 없으니, 뒤집어 생각해보면 중심도 없는 셈이다. 중심과 가장자리의 구별은 따라서 인위적이며 상대적인 나눔이다. 인생이 그렇다. 우주의 시공에서 그저 흘러가는 게 인생이니, 따로 정처定處를 두고 있는 게 아니다. 그 흐름 속에서 너무 그악스럽게 인생의 한 자락을 붙잡고 다툴 수만은 없다. 가없는 우주, 그 광대무변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우리는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할까. 아침의 강변, 석양의 강변, 저녁 무렵의 강변에서 생각해 볼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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