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백종훈 기자
  • 입력 2024.03.23 08:00

안성훈 법무법인 법승 변호사

법무법인 법승 변호사 안성훈. (사진제공=법승)
법무법인 법승 변호사 안성훈. (사진제공=법승)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앞부분이다. 이 시는 이름을 통해 어떤 존재가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잘 그리고 있다. 

실제로 그렇다. 우리가 자기를 소개할 때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름이 아닌가?

즉, 나는 내 이름이다. 태어나서 이름을 가진 다음에야 하나의 인격이 되고 그 인격을 바탕으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내 이름이 고유의 내 이름대로 불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여권에 적히는 '로마자 이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이름을 한자로 짓는다. 하지만 요새는 순수한 우리말로만 짓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특정 영어 단어나 발음을 염두에 두고 아예 영어 이름을 우리말로 표기해 이름을 짓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 여권을 처음 신청하면 ‘내 이름을 내 이름대로 쓰지 못하는 문제’가 생긴다. 이름을 지을 때 고려한 영어 스펠링과 여권 당국이 제시하는 표기법상의 스펠링이 달라 결국 원하는 로마자 이름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여권법령은 이름을 로마자로 바꿔쓰는 기준의 원칙으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출입국 심사 관리나 우리 여권에 대한 대외 신뢰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을 지킬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일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은 합리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문제는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고시가 오래도록 개정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발음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나아가 한국어를 로마자로 단순하게 치환시키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유연성이 떨어지며 반대로 영어 등을 한국어로 바꾸는 것에는 기능을 다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를 들어 애초에 영어와 같은 외국어를 먼저 염두에 두고 지은 이름의 경우 다시 이를 로마자로 표기하면 불일치가 발생한다. 6월에 태어난 아이라는 점을 기념하고자 ‘June’이라는 영어이름을 먼저 짓고, 이것을 우리말 이름으로 ‘주은’이라고 지은 사례가 바로 그런 사례다.

외교부는 ‘June’이라는 영어이름을 여권에 기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Ju Eun’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고 보았다. 그러나 행정심판위원회는 ‘주은’을 ‘June’으로 기재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아 외교부의 판단을 뒤집었다.

행정심판위원회의 이런 판단은 여권법령에서 ‘가족관계등록부에 등록된 한글 성 또는 이름이 로마자로 표기되는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의 음역이 일치할 경우 그 외국식 이름 또는 외국어를 여권의 로마자 성명으로 표기할 수 있다’고 예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에도 불구하고 외교당국은 유연한 결정을 하기를 주저하는 경향이 있어 여권 신청 단계에서 그러한 이름이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행정심판까지 거치고 나서야 받아들여지는 경우들도 있다. 

국가행정의 효율성과 여권의 대외 신뢰도는 중요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름이 인생에서 갖는 의미가 그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이름 찾기를 위한 투쟁, 고되지만 때로는 해야 하는 투쟁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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