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탄핵 부결] 최악 피했지만…재계, 내년 보수적 사업계획 '불가피'
정국 불안 영향…시나리오별 분석하고 대응책 마련 '분주'
[뉴스웍스=채윤정 기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와 탄핵소추안 투표가 이어지면서 정계는 물론, 우리 경제계에 불안감을 드리웠다. 탄핵안은 부결됐지만, 정치권의 탄핵 공방은 계속되고, 윤 대통령의 2선 후퇴까지 예상되면서 국정 동력 약화는 불 보듯 뻔한 현실이 됐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내년 1월 출범하는 상황에서 비상계엄사태로 국가 신인도가 하락하고, 정부의 협상력까지 약화될 것으로 보여 재계는 우려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8일 재계와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가뜩이나 높아졌던 정치·경제의 불확실성이 한층 심화함에 따라 내년 사업계획을 전면 검토하고, 더 보수적인 경영에 돌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45년 만의 비상계엄은 한국 경제의 안정성에 의문을 품게 한 사건이었다. 며칠 사이 환율은 1400원대로 고착되고, 증시는 내리막을 거듭했다. 또한 윤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 임기를 포함한 정국 안정 방안을 여당인 국민의힘에 일임한 것도 향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전망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탄핵안은 부결됐지만, 국정 동력의 약화는 기정사실화 됐다"며 "대외적 리스크가 전방위적으로 덮쳐오는 상황에서 기업은 정부의 외교적 협상력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까지 몰렸다"고 진단했다.
또다른 재계 관계자 역시 "이제 국내 이슈는 '경제'가 아니라 '정치'로 바뀐 셈"이라며 "정부와 기업이 원팀이 되어서 난국을 헤쳐나가는 것도 모자랄 판에 이제 기업만 홀로 대응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고 우려했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최근 발표한 '2025년 500대 기업 투자계획 조사'에 따르면 내년도 투자를 양적인 측면에서 늘리지 않겠다는 기업이 대부분(87.2%)을 차지했고, 질적 측면에서도 소극적인 유지·보수를 택한 기업이 다수(77.8%)였다.
이런 결과는 내년 보호무역주의 심화에 따른 글로벌 교역 위축과 글로벌 경기가 올해보다 둔화할 것이란 전망에 따른 것으로, 이미 기업들은 보수적인 투자 기조를 선택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SK·LG 등 국내 주요 기업들은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등의 정치적 리스크가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시나리오별로 따져보고,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주요 기업들은 내년 투자 계획을 보수적으로 잡았지만, 정치적 리스크까지 더해지면서 투자를 더 축소해야 한다는 시각도 나온다.
이에 대해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는 "내년 사업 계획은 이미 세웠지만, 최근 정치적 이슈에 환율이 1400원을 넘어서는 등 상황이 몇 주만에 많이 달라졌다"며 "결국 내년 사업 계획을 크게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라고 분석했다.
SK그룹은 비상계엄이 종료된 4일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이 참여한 가운데 일부 계열사 최고경영자(CEO) 및 주요 임원 등이 참석해 비상계엄 사태 이후 상황을 점검하고 그룹 경영활동에 대해 논의했다.
그룹 관계자는 "정치적 변동성이 커질 경우 투자가 위축될 가능성이 크다"며 "또한 사업 허가 지연과 같이 경영활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업 포트폴리오가 큰 기업일수록 더 위험에 노출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날 LG그룹도 계열사별 회의를 진행해 환율 및 금융 시장 동향을 살피며 대응책에 대해 논의했다. HD현대도 이날 긴급 사장단회의를 개최하고, 향후 발생 가능한 예상 상황을 점검하고, 사별 대응 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기업들은 한국이 글로벌 공급망 입지가 크게 좁아지면서 수출이 감소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외신들 역시 반도체 및 배터리 등 핵심적인 품목의 생산거점인 한국이 정치적 불확실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블룸버그통신은 한국에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SK하이닉스로부터 고대역폭메모리(HBM)를 대부분 공급받는 엔비디아에 대한 우려를 제기했다. 블룸버그는 한국의 HBM 공급이 불안정한 상황인 만큼, 엔비디아의 공급망 다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경제 매체인 더스트리트는 엔비디아의 주가에 한국의 불안정성이 새로운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수십조원 규모로 투자를 단행하고 있는국내 반도체 기업들은 정부 협상력이 약해지면서 보조금 축소가 일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정상회담 일정이 취소되는 등, 대외적인 영향력이 약화한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가 삼성전자 및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에 대한 반도체 보조금 축소를 밀어붙인다면 이를 막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또한 트럼프 정부가 미국 IRA(인플레이션 감축법)로 인한 첨단제조 생산 세액공제(AMPC) 지원 중단을 추진할 경우 배터리 업체들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 밖에도 커지는 환율 변동성이 내년 영업이익 및 순이익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따지고 있다. 비상계엄 쇼크를 받은 데다가, 정치적 불안이 이어지면서 원달러 환율 상승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최근 LG에너지솔루션은 원달러 환율이 10% 오르면 2389억원의 법인세차감전순손실이 발생하게 될 것으로 분석했다.
노조 리스크도 걱정거리다. 현대자동차 노조와 한국지엠 노조는 지난 5~6일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
현대자동차 노조의 울산·아산·전주공장 조합원 4만3200명은 5일과 6일 주야간 각 2시간씩 파업을 진행했다. 7일에는 노조 간부들만 특근을 거부하고,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전국금속노동조합 결의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지엠 노조도 5~6일 전·후반조가 2시간씩 생산을 중단했다.
이들 노조를 포함, 금속노조 산하의 노조들은 윤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부결될 경우 총파업 등 더 강한 행동에 나설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