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친가와 크게 비교되는 김정은의 외가 Story
원래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과거로부터 탈출, 과거로부터 단절을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다. 구체제 봉건주의가 정치체제에서 세습에 의한 권력창출이 기본방식이라면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인민민주주의에 의한 선거로 통치자를 간접 선택하는 아주 그럴듯한 통치방식을 강조한다.
오늘 북한의 정치체제는 과연 사회주의 공산주의 방식인가? 아니다. 벌써 3대가 세습으로 북한을 통치하고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그 기간이 자그만치 올해로 80년째다. 북한의 집권당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심심찮게 노동당의 1000년 집권을 중얼거리는데 모두 김 씨 왕조의 세습에 의한 장기집권 희망을 의미한다.
최근 필자는 북한에서 김정일의 처 고용희 일가와 함께 살았던 중요 탈북민과 인터뷰를 할 행운을 가지게 되었는 바, 그 친구 역시 아버지가 고용희 아버지 고경택과 같은 귀국선을 타고 북한으로 들어온 북송교포 출신이다. 뉴스웍스 지면을 통해 친가와 크게 비교되는 김정은 외가의 Story를 파헤쳐 보고자 한다.
김정일의 처 고용희는 1952년 일본 오사카 생이며 그는 아버지 고경택의 손목을 잡고 1962년, 그러니까 10살 때 북송선을 타고 청진항에 내렸다.
1959년부터 시작된 일본 재일동포 북송작업은 북한 정권과 일본, 그리고 한덕수를 중심으로 한 친북 재일동포 집단이 합작한 북한 노동력 보충 및 인구 팽창을 위한 현해탄을 가로지르는 '대이동'(大移動)이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 3340명의 재일교포를 북한으로 송환한 사건이다. 1959년 북한과 일본이 체결한 '재일교포 북송에 관한 협정'에 따라 이른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민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북송사업이 시작된 이후 25년 동안 총 187회에 걸쳐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항에서 북한의 청진항으로 향했다.
당시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이주한 재일 한인 9만 3340명 중 재일 교포의 98%는 고향이 남한이었고, 일본인 아내 등 일본인 6800여 명도 포함돼 있었다. 북한 정권은 북송선이 청진항에 도착하면 중앙에서 별도 심사단을 청진으로 파견해 일일이 심사를 해 북한 각지에 배치하되 주로 경공업이 발달된 지역 중심으로 배치했다.
당시 이 심사단의 핵심 간부 중 대한민국에 고위급 간첩으로 파견돼 체포 후 전향한 오기완 선생이 있어 필자는 그 분과 함께 국가 주요 기관에서 직장생활하며 그 심사과정을 열심히 기록해 두었다.
오기완 선생은 6·25 초기 김일성의 전우 류경수 105탱크 여단의 정치장교(대위)로 서울에 입성했고 그뒤 모스크바 유학 후 김 일 부주석의 보좌관을 지내다 한국에 있는 친척 보안사령부 중령을 포섭하라는 임무를 받고 남파된 고위급 대남공작원이었다. 아무튼 이 분에 의해 성분이 분류된 고용희 아버지 고경택은 함경북도 화성군의 수지일용품 공장 기사로 배치받았다.
일제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고경택은 한 때 일본군 군복을 생산하는 피복공장의 책임자로도 일해 친일파란 브랜드가 따라 다니지만 북한에서는 경공업 발전이 필요하다보니 플라스틱 사출 능력이 있는 그를 요긴하게 활용하게 된다. 한편 고경택은 일본에 살 때 밀항 등 일본의 국내법을 어겨 처벌을 받을 위험이 다가오자 선뜻 북송선에 올랐다고 한다.
1960년대까지 북한의 지방공장들은 잘 돌아가다보니 화성의 수지일용품공장은 생산능력이 좋았고 그래서 고경택은 예쁜 딸 고용희를 평양음악무용대학에도 보낼 수 있었다. 사실 북한도 1960년대 까지만 해도 출신성분보다 성적대로 대학에 추천하는 풍토가 남아 있었기에 고용희의 평양 중앙대학 입학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예체능계 대학은 연령과 무관하게 입학하고 졸업할 수 있어 고용희는 만 18살인 1971년 평양음악무용대학을 졸업하고 북한 최고의 예술단인 만수대예술단 무용배우로 채용되게 된다.
더욱 놀라운 일은 고용희는 만 19살인 1972년 12월 북한 예술인들의 최고 영예인 공훈배우 칭호를 받게 되는데 거의 신기록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당시 17살의 '꽃파는 처녀' 주인공 홍영희가 공훈배우 칭호를 함께 받아 그가 북한 최연소 공훈배우 칭호 수여자로 기록되지만, 19살에 공훈배우가 된 것도 북한 최초의 일이다.
당시는 김정일이 소위 '음악정치'의 시원을 열며 5대 혁명가극 등 북한 문화예술의 르네상스기가 개막되던 시기인지라 고용희에게도 그런 영예가 차려졌던 것이다. 거기서 그친게 아니다. 고용희는 1973년 그러니까 만 20살 때부터 김정일과 거의 동거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
고용희가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 후 그의 아버지 고경택이 함경북도 화성에서 지독한 플라스틱 냄새를 맡으며 살 사람이 아니었다. 원래 인물이 출중해 영화배우를 해도 좋다는 평을 받아온 고경택은 곧 평양으로 올라가게 된다. 북한의 대외공작기관인 해외동포위원회 등에서 그리 높지 않은 간부로 일하던 고경택은 고용희가 죽기 5년 전인 1999년 사망한다. 딸자식 덕을 크게 보지도 못한 채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다.
북한 정권은 오늘도 김정은 위원장의 외가에 대해 일체 함구하고 있다. 친가 즉 '만경대가문'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왜 '오사카 가문'은 말을 못꺼낼까? 아마도 북한이 일본과 수교하고 대일보상금 등을 받아내게 된다면 모를까 아직 항일의 혁명전통을 고수하고 있는 조건에서 고경택과 고용희의 존재는 땅속에 묻힌 '시신'에 머물러야 할 인물들이다.
현재 고용희 묘는 대성산의 경치좋은 곳에 조성돼 있지만 김정은, 김여정 등이 거기를 참배하고 있다는 뉴스는 일절 비밀이다. 자기 모친이 제대로 햇빛도 못보고 그늘 속의 '영부인' 행세를 하다 저 세상으로 간 원한은 김정은 위원장에겐 평생의 한으로 남다보니 오늘 어린 딸 주애를 이끌고 여러 행사장에 자주 출몰하는 이벤트를 계속 연출하고 있지는 않을까.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