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만 믿지 마라"…HD현대, 정유·건설장비 '리밸런싱' 나섰다
정유 및 건설장비 구조적 위기…체질 개선 작업 박차 조선 부문도 발주 감소 위기…당장은 '모니터링'만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우리가 눈앞의 실적에만 편승해 위기의 심각성을 간과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권오갑 HD현대 회장, 3일 사장단 전체회의)
HD현대가 하반기부터 부문별 사업 재편 및 체질 개선을 본격화한다.
재계에 따르면, HD현대는 3일 정기선 수석부회장과 권 회장이 주최한 하반기 전략회의에서 부진한 사업군은 사업 재편을 포함한 종합 대책을 수립해 즉시 시행하고, 중장기 사업계획 역시 원점에서 재검토하기로 했다.
지난해 HD현대는 주력인 조선 부문 실적 호조를 앞세워 영업이익 3조원이라는 전무후무한 실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올해 들어 조선 부문은 고부가가치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 발주 감소 등 외부 변수에 전망이 불투명해졌고, 그룹의 또 다른 축인 정유와 건설장비는 구조적 불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체질 개선이 가장 시급한 부문은 장기적 글로벌 공급 과잉을 겪고 있는 정유·석유화학 계열이다.
HD현대오일뱅크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8.4% 늘어난 30조4686억원으로, 매출만 따지면 HD현대의 핵심인 조선 계열사보다 비중이 높다. 그러나 지속적인 수익성 하락으로 영업이익은 58.2% 줄어든 2580억원에 그쳤다.
올해 1분기 매출과 영업이익은 7조1247억원, 31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9.6%, 89.8% 줄었다. 당기순손실은 481억원으로 적자 전환했다. 2분기는 일시적 유가 상승에 따른 정제마진 개선으로 영업이익 개선이 예상되지만, 구조적 불황은 해결되지 않아 단기 효과에 그칠 전망이다.
이에 HD현대오일뱅크는 수개월 전부터 롯데케미칼과 충청남도 대산 석유화학단지에 보유 중인 나프타분해설비(NCC) 통합을 논의하고, 지난 6월 중순께 양해각서(MOU)를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통합 방식은 HD현대오일뱅크가 지분 60%, 롯데케미칼이 지분 40%를 보유한 기존 합작법인인 HD현대케미칼을 활용하거나, 별도 조인트벤처(JV)를 설립해 설비를 현물 출자하는 방안 등이 유력하다.
석화업계 한 관계자는 "인건비와 전기료, 유지보수비 등 고정비 절감과 원재료 구매 협상력 제고 효과는 있을지언정, 전체적인 수요가 워낙 침체된 상황에서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정유 부문에서는 어려운 시황과 대조적으로 오히려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다. HD현대오일뱅크는 지난달 글로벌 에너지기업 쉘과의 합작법인인 HD현대쉘베이스오일을 통해 고성능 및 고부가가치 윤활기유(그룹3) 시장에 진출키로 했다.
윤활기유는 엔진오일 및 산업용 윤활유 등 윤활유 제품의 필수 원재료다. 제조 공정 및 품질 특성에 따라 그룹1부터 그룹3로 분류되는데, HD현대오일뱅크는 그룹2에 주력해 왔다. HD현대쉘베이스오일은 윤활기유 대산공장 증설 투자를 통해 오는 2027년 상업 가동을 목표로 한다.
건설기계 중간지주사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계열사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간 합병을 추진한다. HD현대사이트솔루션은 전방산업인 건설업 불황으로 인해 지난해 매출 7조7731억원, 영업이익 4324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각각 11.1%, 40.3% 줄어든 실적이다.
올해도 만만치 않다.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 1분기 영업이익은 각각 417억원 678억원으로 전년보다 22.3%, 27% 줄었다. 전 세계적인 경기 침체 회복세가 더딘 만큼 2분기도 뚜렷한 모멘텀은 없는 상태다.
양사 사업이 어느 정도 중복되기에 오는 2026년 1월 합병 후에는 생산설비 및 마케팅, 연구개발(R&D) 중복 투자를 차단하고, 제품 라인업은 확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재명 정부가 자본 시장에서 주주가치 제고에 역행한다고 판단하는 중복상장 논란에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중공업업계 한 관계자는 "다만 합병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스템 통합과 법률 자문 비용 등 1회성 지출과 중복 인력 구조조정 우려가 발생할 수 있다"며 "합병 비율 산정에 따라 일부 주주들 사이에서 불만도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 중간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HD현대중공업·HD현대미포조선·HD현대삼호중공업)의 경우, 시황 호조세에 힘입어 그룹 전체 실적을 견인하고 있다.
지난해 HD현대 영업이익 2조9832억원 중 1조2000억원이 HD한국조선해양에서 비롯됐을 정도다. 수주잔고도 3~4년치가 쌓여 있는 상태로, 당장 리밸런싱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선박 발주량이 줄어드는 등 외부변수는 항시 도사리고 있는 상태다. 영국 조선해운시황 전문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지난 1~5월 글로벌 누계 수주량은 전년 동기 대비 45.4% 줄어든 1592만CGT(515척)에 그쳤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국내 조선사들이 건조 부문에서 강세를 보이는 LNG운반선도 올해 1분기 글로벌 발주량은 전년보다 81% 줄어든 48만CGT에 불과하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고관세 정책으로 글로벌 물동량이 위축돼 있기 때문이다. 추후 미국 행정부가 해외 국적 조선사로의 발주를 막고 있는 존스법 등을 폐지하거나, 대량의 LNG운반선과 군함 등을 발주할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으나, 변동성이 큰 트럼프 행정부 특성상 불확실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