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광그룹의 딜레마…'사업 확대'와 '신뢰도 제고' 선택은

주력 석유화학 및 섬유 불황에 신성장동력 확보 절실 오너리스크에 얼룩진 회사…투자보단 주주가치 제고부터

2025-07-17     안광석 기자
서울시 광화문 태광그룹 흥국생명 빌딩. (사진제공=태광그룹)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고질적 오너리스크를 겪어온 태광그룹이 '사업 확대'와 '클린 경영'의 갈림길에 섰다.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주력 사업인 석유화학 및 섬유 부문 성장에 한계가 뚜렷한 만큼 포트폴리오 확대가 절실하다. 이런 상황에 태광산업은 최근 사업자금 조달 명목으로 주주가치 희석으로 이어질 수 있는 자사주 활용 교환사채(EB) 발행을 결정해 당국과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다.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50부(재판장 김상훈)는 이달 18일부터 태광산업 2대주주인 트러스톤자산운용이 낸 이사위법행위유지 가처분 신청 심문기일에 돌입한다. 법원의 최종 결정은 이르면 이달 중 나온다.

앞서 태광산업은 지난 6월 27일 이사회를 열어 자사주 27만1769주 전량(약 24.41%)을 기초자산으로 3186억원 규모의 EB를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현재는 이재명 정부가 주주가치 제고를 위해 이사와 주주 충실 의무 확대를 명시한 상법개정안을 처리한 데 이어, 자사주 소각 의무화까지 추진하는 시점이다.

이에 트러스톤은 같은달 30일 EB 발행이 주주가치를 훼손하고 대주주의 지배력 강화를 위한 꼼수라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발행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금융감독원도 이달 1일 이를 사실상 자사주 처분 행위라고 보고 처분 상대방 등을 상세히 기재토록 정정명령하면서 결국 태광산업은 EB 발행을 취소했다.

EB 발행에 대한 구체적 사유가 불분명하기는 하지만, 현재 태광그룹이 미래성장동력 확보가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핵심 계열사인 태광산업은 1분기 영업이익 27억원으로 적자를 겨우 면했다. 주력사업인 석유화학 및 섬유 부문은 중국 내수 불황 및 원료가 하락, 나일론 재고 증가 등으로 향후 수년간 수익 창출이 어렵다. 심지어 핵심 제품군인 스판덱스 중국 공장도 가동 중단 내지 완전 철수를 검토 중일 정도다.

태광그룹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창업주 고(故) 이임용 명예회장 때부터 이어져 온 무차입 경영이다. 1990년대 태광산업은 금융 차입 없이 오로지 자체 자본을 기반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부채비율을 장기간 100% 미만으로 유지했는데 이는 현재도 그렇다.

그러나 이 명예회장의 삼남인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경영에 나선 2000년대부터는 변화무쌍한 외부변수에 무차입 경영 기조를 유지하기 힘들어졌다. 이 과정에서 이 전 회장은 계열사 간 내부거래와 자금 순환을 통해 그룹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고, 결국 횡령·배임 혐의로 2011년 법정구속되면서 10년 이상 미래성장동력에 대한 투자를 단행하지 못했다.

현재 태광그룹이 화장품 등 생활용품을 주력으로 하는 애경산업 인수를 추진 중인 것도 본업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신성장동력을 확보하려는 차원이다.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하기 위해서는 투자금이 필요한데, 태광산업은 EB 발행 후 1조5000억원을 투자할 계획이었다.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이 지난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횡령) 등 혐의로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뉴스1)

그런데 자금 조달 방식이 자사주 기반 EB 발행, 즉 주주들의 희생을 담보로 한 자금 조달이라는 점에서 논란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현재는 태광산업 비상근 경영고문으로 등록돼 있는 이 전 회장에서 비롯된 오너리스크가 크게 작용했다는 비판이 잇따른다.

참여연대 등 노동시민사회 단체들은 지난 16일 이 전 회장을 특정경제가중처벌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최근 EB 발행을 결정한 태광산업 이사회가 아닌 이 전 회장을 찍었다는 것은 그가 회장이 아닌 고문임에도 그룹 경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확신에서다. 시민단체 한 관계자는 "이 전 회장이 EB 결정 등 주요 경영 사안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이 담긴 내부 녹취록 2100건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논란의 여지는 또 있다. 태광산업은 애경산업을 인수하기 위해 신생 사모펀드인 '티투프라이빗에퀴티'를 활용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 회사는 이 전 회장 일가족이 약 36.4%의 지분을 직·간접적으로 소유 중이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들은 계열사 자사주가 이 전 회장 일가 승계구도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태광그룹의 유동자산은 무차입 경영 기조에 따라 3조원에 육박함에도 불과 32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각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는 것도 진정성이 의심된다. 앞서 태광그룹은 불법 비자금 조성 등 횡령과 배임 혐의로 수감된 이 전 회장이 특별사면을 받기 전인 지난 2022년 대규모 투자와 신규 채용을 약속했지만, 이후 오히려 임직원을 해고했다.

이 전 회장은 과거에도 반복된 사익 편취와 내부거래, 금융계열사 불투명 경영 등으로 도덕적 해이라는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또한 태광그룹은 고질적으로 낮은 주가순자산비율(PBR)과 배당성향으로 자본 시장에서 비판을 받아왔다.

이에 따라 시민단체 및 경영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태광그룹이 중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사업 영위도 중요하지만, 신뢰 회복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아무리 사업 계획이 좋아도 기업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면 결국 자금 조달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태광의 경우, 투명한 투자 의사결정 과정과 전문경영체제 확립, 자사주 소각과 배당 확대 등 정부의 주주가치 제고 정책부터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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