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관세협상 키워드 급부상한 '조선업'…美 무엇 요구할까
美 투자액은 日·EU 못 따라가…조선업 통해 관세 인하 꾀하나 직접투자 및 기술력·인력 요구할듯…韓조선 경쟁력 보존해야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미국 수출 경쟁국인 일본에 이어 유럽연합(EU)도 미국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하고 상호·품목관세 인하를 약속받으면서 한국 정부의 부담이 가중된 가운데, 한국이 쥔 조선업 카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관심이 주목된다.
관세 10%를 낮추기 위해 미국에 투자를 약속한 일본(약 692조2500억원)과 EU(약 830조7000억원) 투자 규모는 모두 한국의 1년 연간 예산액(올해 기준 677조4000억원)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한국 정부는 '137조원+α'를 투자를 약속했는데, 웬만한 '+α' 조건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마음을 움직이기 쉽지 않을 전망이다.
28일 관가에 따르면,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상호관세 유예 마지막 날인 오는 31일(현지시간) 미국에서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 그간 이어져 온 양국 간 통상 논의를 최종 조율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가 원하는 것은 일본이나 EU처럼 25% 상호관세를 15%로 낮추고, 자동차와 철강 등에 붙는 품목관세를 낮추는 것이다. 수출과 제조업으로 먹고 사는 한국은 이것만 해도 상당한 경제 타격을 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한국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카드는 트럼프 대통령이 올해 초 취임 때부터 강조해 온 ▲조선산업 협력 강화 ▲알래스카 액화천연가스(LNG) 프로젝트 참여 ▲쌀·소고기 수입 ▲137조원+α에서 더 나아간 투자 규모 확대 등이다.
기존 미국이 일본이나 EU와 타결한 조건 등을 고려하면 한국이 협상에서 우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조선업뿐이다.
미국 역시 이를 알고 있는 만큼, 조선업 협력 부문에서도 미국 조선 산업 재건을 위한 직접적인 투자 및 기술 이전 등 다소 무리한 요구를 해올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미국은 자국 조선 산업의 노후화된 시설과 부족한 생산 능력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조선소에 직접 투자하거나, 인수해 생산 능력 확대를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지난 1920년 제정된 '존스법'이다. 존스법은 미국 내 항구를 오가는 모든 화물을 자국에서 건조하고, 소유자나 승무원도 미국 시민과 영주권자인 선박만 운송하도록 명시했다.
존스법은 오늘날 미국 조선소들의 경쟁력을 잃게 한 원흉이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타국이 미국에 직접 투자하게 하는 무기로 삼고 있다. 독자 기술력을 갖춘 한화오션이 필리조선소를 인수한 것이나, HD현대가 에디슨 슈이스트 오프쇼어 등 미국 조선소들과 굳이 협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은 또 한국이 보유한 LNG 운반선 등 고부가가치 선박 및 수상·수중함 등의 AI 기반 방산 건조 기술 협력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숙련된 한국 조선 건조 전문가들을 미국에 초청하거나 취업시켜 전문인력을 양성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상 기술 이전인 셈이다.
아울러 관련 산업 일자리 창출 등을 위해 미국 방산 및 조선 기자재 공급망에 한국 조선사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 미국은 이같은 조선업 관련 요구안 제시에 앞서 일본이나 EU 사례처럼 구체적인 투자 규모나 로드맵, 이행 일정 등을 명확히 해달라고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국내 통상 전문가들은 이같은 미국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관세 인하 효과는 어느 정도 볼 수 있어도 한국 조선업 후퇴가 불가피하다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은 국내 조선소 대비 2~3배에 달하는 높은 인건비와 숙련공 부족 및 낙후된 설비 등으로 국내 조선소와 같은 생산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는 국내 조선사들이 미국 내 조선소에 대규모 투자를 하더라도, 투자 회수 지연 및 재무구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또한 국내 조선사들이 미국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거나 투자를 확대할 경우, 국내 조선소의 생산량과 고용도 줄어들 수 있다. 이는 국내 협력업체 및 후방 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울산 및 거제 등의 지역경제 침체를 야기한다.
무엇보다 우려되는 것은 중국의 무서운 추격을 뿌려쳐온 원동력인 고부가가치 기술력 유출이다. 한국 조선사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LNG 운반선 및 친환경 선박, 스마트 조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해당 기술이나 인력이 미국에 넘어간다면 국내 조선산업 매력도 추락으로 인한 수주 감소 및 R&D 투자 위축, 인력난 등이 불가피하다.
한 통상 전문가는 "해외처럼 미국 요구안을 전적으로 수용한다면 단기적인 관세 인하 효과를 얻을 수 있겠으나, 중장기적으로 한국이 경쟁력을 가진 조선업에는 재기 불능이라는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국 정부의 조선업 재건 정책은 정권 교체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다"며 "지금은 미국 요구안을 면밀히 분석하고, 국익 최우선 기반의 피해 최소화 방안을 철저히 마련해야 한다는 것 밖에는 무엇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