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포자기 대기업들…자사주 소각 의무화 방안 고뇌
삼성전자·HD현대·두산 등 '자사주 마법' 효과 반강제 포기 지배구조 개편도 불가피…포이즌필 등으로 반발 무마해야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삼성전자를 비롯한 국내 주요 기업들이 이재명 정부의 자본시장 밸류업 정책을 대표하는 강력한 자사주 소각 방침인 3차 상법개정안에 반강제적으로 참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업들은 자사주 소각 자체를 원천적으로 반대하는데, 법안의 근본적인 취지는 자사주 활용 '꼼수'를 막고 주주가치를 높이는 데 있다. 따라서 9월 정기국회에서 해당 법안이 처리되기 전까지 기업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정될 가능성이 없어서다.
물론 주주들 입장에서는 법안 통과 후 1년이 지나면 자사주 소각에 따른 주주가치 제고 및 주가 부양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다만 기업으로서는 그동안 자사주를 단순 주주환원 뿐만 아닌 경영의 전략적 도구로 활용해 온 만큼 경영권 방어 수단 상실과 재무적 유동성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
1일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자사주 소각에 대한 시일 및 방법론에 대한 내부 논의 중이다. 이미 LG·기아·현대모비스·HMM·두산·네이버·신한금융지주 등이 대규모 자사주 소각 계획을 세웠거나, 발표할 예정이다. 이런 상황에 삼성전자의 자사주 소각 방침의 윤곽이 드러나면 상장기업들의 소각 러시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정부 방침이라 어쩔 수 없고 삼성전자도 주주가치 제고를 지향한다고 해도 잇따른 자사주 소각은 부담이 따른다.
삼성전자는 최근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자사주 소각을 진행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는 지난 2024년 11월 이사회에서 주주환원을 위해 발표한 10조원 규모 자사주 매입 후 소각 계획의 일환이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11월부터 3개월간 3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했고, 이는 올해 2월 전량 소각했다. 같은달 2차로 3조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한 뒤 이중 2조5000억원을 소각했고, 나머지 5000억원은 임직원 주식 보상용으로 사용됐다.
삼성전자는 지난 7월 기준으로 10조원의 나머지인 3조90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추가로 취득했다. 이 중 2조8000억원을 소각해 10조원 계획을 마무리할 예정인데, 삼성전자가 최근 밝힌 입장은 이미 7월 매입을 완료한 자사주 소각 절차를 신속하게 마무리하겠다는 의미다.
즉, 삼성전자는 3차 상법개정안이 통과되면 법적 의무에 의해서는 물론, 잉여현금흐름(FCF)의 50%를 주주에게 환원한다는 자체 방침에 따라 추가적인 자사주 소각을 실시해야 한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주식 8.5%는 삼성생명이 보유 중인데, 삼성전자 주식을 추가로 소각하면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의 지분율이 높아져 '삼성생명법'에 걸린다.
삼성생명법은 금융회사가 계열사 주식을 총자산의 3% 이상 보유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다. 삼성생명은 이미 여러 차례 삼성전자 주식을 매각한 바 있다. 추가적인 소각이 이뤄질 경우, 삼성생명은 다시 해당 주식을 매각해야 한다. 과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일명 ‘자사주의 마법’을 체험했던 삼성은 더 이상 자사주 활용이 불가능해지고, 금액적 부담에 지배구조 개편까지 감수해야 하게 된 것이다.
자사주 소각을 준비 중이면서 지배구조 개편이 걱정되는 곳은 HD현대나 두산도 마찬가지다.
양 그룹 모두 과거 삼성과 마찬가지로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해 왔다. 예컨대 인적분할 시 자사주 의결권이 부활해 대주주의 지분율을 높이는 방식이다. 이에 따라 자사주 비중이 10%가 넘는 지주사들이 많다. 그러나 자사주 소각 시 이러한 지배력 강화 수단이 사라져 양사 오너 일가의 승계 과정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또한 적대적 M&A 시도가 있으면, 방어할 수 있는 카드가 줄어 경영권도 불안정해질 수 있다.
현재 HD현대 지주사는 10.5%에 달하는 자사주를 보유 중인데, 그룹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핵심 수단이었기에 소각 결정이 쉽지 않다. 더욱이 HD현대는 주주환원 정책이 배당에 치중돼 있어, 자사주를 활용한 주주가치 제고에 대한 주주들의 요구가 큰 상황이다.
두산도 자사주 비율이 18%가 넘어 비중이 높은데, 과거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소액주주들의 반발을 겪은 바 있어 자사주 소각에 대한 압박이 더욱 클 수밖에 없다. 두산이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최근 선제적으로 자사주 소각 계획을 발표한 것도 이 때문이다.
SK·롯데·LG도 일찍부터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고, 경영권 승계 또는 방어에 자사주를 활용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SK는 과거 외국계 헤지펀드인 소버린의 경영권 위협 당시 보유 자사주를 활용해 방어에 성공한 경험이 있다. 이 때문인지 최태원 SK 회장도 "자사주를 살 사람이 앞으로 과연 사겠느냐"며 자사주 소각 의무화에 대해 난색을 표한 바 있다.
한 경영학자는 "그러나 정부의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과 상법개정안 추진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이들 기업도 주주가치 제고라는 명분을 외면하기 어렵고 자각도 하고 있다"면서 "정부도 자사주 소각 시행까지 시간이 넉넉한 만큼 차등의결권이나 포이즌 필(독약 조항)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 일부 도입을 검토해 반발을 무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