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자원 화재에 정부 서비스 중단 사태…무색해진 '이중화 조치'
[뉴스웍스=박광하 기자]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정부24, 모바일 신분증 등 핵심 정부 서비스가 무더기로 중단됐다. 국가 정보시스템의 이중화 조치 부실, 무정전전원장치(UPS) 관리 문제 등 구조적 취약점이 여실히 드러났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27일 소방당국에 따르면 전날 오후 8시 15분께 대전 유성구 화암동 국정자원 5층 전산실에서 UPS에 내장된 리튬이온 배터리 폭발로 발생한 불이 이날 9시간 50분 만에 꺼졌다. 대전시 소방본부는 인원 170여 명과 소방차 등 차량 63대를 투입해 10여 시간 만에 화재를 진압했다.
화재는 UPS 교체 작업 중 배터리에서 스파크가 튀면서 시작됐다. 화재로 40대 직원 1명이 얼굴과 팔에 1도 화상을 입었으며, 100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이번 화재로 모바일 신분증, 국민신문고 등 1등급 12개, 2등급 58개 시스템이 중단됐다. 기획재정부, 국무총리비서실, 행정안전부 등 주요 정부 부처 웹사이트 접속도 마비됐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화재 진압과 안전을 위해 전산실 전원을 차단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대전 본원과 광주센터 등을 통해 이중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이번 화재로 핵심 서비스들이 일제히 중단되면서 "무늬만 이중화"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김영철 ICT폴리텍대학 교수는 앞서 통화에서 "서버 등 인프라 이중화를 한 상태에서도 장애가 발생한다는 것은 설계에서부터 근본적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이중화는 단순히 백업 센터를 갖췄다는 수준이 아니라, 장애 발생 시 즉시 대체 가능한 시스템이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은 대전 본원 외에 광주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현재 전자기펄스(EMP)에도 견딜 수 있는 재해복구센터를 구축 중이다. 하지만 이번 화재에서 백업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번 화재는 지난 2022년 SK C&C 판교 데이터센터 화재를 연상시키는 지점이 존재한다. 리튬이온 배터리는 에너지 효율성과 저장 능력이 뛰어나지만, 충격·과충전·내부 단락 등에 취약해 화재 위험성이 크다. 지난해 발생한 싱가포르 데이터센터 화재 등, 최근 5년간 UPS로 인한 화재가 총 57건 발생했으며 매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통신업체들은 화재 위험성을 인식해 대응책을 마련했다. KT는 2021년 자사 데이터센터의 리튬이온 배터리를 납축전지로 교체했으며, LG유플러스도 발화 가능성이 낮은 납축전지를 주로 사용하고 있다. 네이버클라우드는 배터리를 사용하지 않는 다이내믹 UPS를 도입했다.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주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먼저 인프라 설계상의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SK C&C 데이터센터와 마찬가지로 국정자원도 전기실, UPS실, 배터리실이 한 층에 배치돼 있어 화재 발생 시 중앙 전원을 차단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한계를 니타냈다. 정보통신기술(ICT) 업계 한 관계자는 "대형 화재를 막기 위해서는 전기실과 UPS실, 배터리실 층을 다르게 설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며 "각각의 시설을 분리해 위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백업 시스템의 한계도 명확히 드러났다. 국정자원은 대전 본원과 광주센터, 대구센터를 운영하며 이중화 시스템을 구축했다고 강조해왔지만, 이번 화재에서는 백업 인프라가 있음에도 즉시 대체 서비스를 제공하지 못했다. 진정한 이중화란 한 곳에서 장애가 발생했을 때 다른 곳에서 즉시 서비스를 대신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재 시스템은 그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됐다.
모니터링 시스템도 문제로 지목된다. 국정자원은 배터리 온도 등을 감시하는 배터리 모니터링 시스템(BMS)을 갖추고 있었으나, 화재 발생 직전까지 화재에 대한 이상 징후를 확인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BMS는 배터리 내 온도·전압 등을 주기적으로 확인해 과충전 방지 등의 보호기능을 수행하는 시스템이다.
진화 설비의 한계도 드러났다. 화재 발생 후 가스 소화 장비가 작동했으나, 가스 소화가 어려운 리튬이온 배터리 화재 특성상 초기 진압에 한계가 있었다. 때문에 배터리 상단에 설치된 전력선이 손상됐고, 화재 진압을 위한 물 사용 시 누전 등 2차 피해 우려로 전체 전력을 차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전문가들은 진정한 이중화 시스템 구축과 함께 화재에 안전한 대체 기술 도입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국가 핵심 인프라의 안전성 강화와 진정한 이중화 시스템 구축을 위한 정부의 대응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른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