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장애, 그 낡은 이름을 지우자
장애 없는 사회, 모두가 더 자유로운 사회
나는 살아오면서 수없이 장애인이라 불렸다. 누군가는 그것을 설명이라 했지만, 내게는 무겁고 낯선 굴레였다. '장애인'이라는 단어 속에는 연민의 시선이 덧씌워지기도 했고, 시혜와 동정이 섞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결코 그 단어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나는 숨 쉬고 웃으며, 화내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평범한 사람이다. 그런데도 사회는 나를 지칭할 때 굳이 장애인이라는 말을 앞세운다. 그 순간 나는 한 사람으로 불리지 못하고 단어에 갇힌 존재가 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조건과 꼬리표로 설명하려는 사회의 습관이 거기서 드러난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단순히 누군가를 설득하려는 의도가 아니다. 내 삶 자체가 이미 증언이기 때문이다.
선거투표소 앞에서 계단을 오르지 못해 투표를 포기해야 했던 날, 승강장이 없는 버스를 기다리다 결국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날, 화장실 문턱 하나를 넘지 못해 몸을 움츠린 채 참아야 했던 순간들 이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나는 깨달았다.
장애는 내 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사회가 나를 그렇게 부른다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장애라는 단어 자체가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꾼다. 그것은 존재를 지우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구분이나 설명이 필요 없는 사회, 서로가 서로를 조건 없이 존중하는 사회다. 왼손잡이라는 말이 더 이상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듯 언젠가 장애라는 말도 그저 다양성을 표현하는 단어로만 남기를 바란다.
장애는 개인의 속성이 아니다. 계단과 턱, 불친절한 제도, 무심한 시선이 우리를 장애인으로 만든다. 부족한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사회의 준비였다. 결국 장애라는 이름은 사회가 붙인 딱지이며, 그 딱지를 떼어내려면 무엇보다 차별을 없애야 한다.
많은 이가 말한다. "장애인을 도와야 한다고". 그러나 내가 듣고 싶은 말은 다르다.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 도움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지만, 공존은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나는 의존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를 함께 책임지고 바꾸는 주체다.
이 길은 결코 쉽게 오지 않았다. 우리는 거리에서 싸워왔다. 버스에 오르지 못하던 시절, 도로에 몸을 묶고 이동권을 외쳤다. 계단뿐인 투표소 앞에서 참정권을 요구했다. 활동 지원 서비스를 쟁취하기 위해 국회를 점거했고, 차별 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광장에서 비를 맞았다. 그 싸움이 있었기에 오늘의 작은 변화들이 가능했다. 그러나 아직도 수많은 장벽이 남아 있다. 이동권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장애인 노동권은 보장되지 못하며, 제도와 정책은 느리게 뒤따르고 있다. 사회가 우리에게 건네는 시선도 온전히 바뀌지 않았다.
장애 없는 사회는 결코 장애인만을 위한 사회가 아니다. 계단이 없는 길은 유모차를 미는 부모에게도, 무거운 짐을 든 여행자에게도 필요하다. 점자 블록은 시각장애인에게만이 아니라 길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수어 통역은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행사와 강연을 찾는 누구에게나 열린 소통의 길을 보여준다.
누구나 불편 없이 오갈 수 있는 길, 누구나 눈치 보지 않고 꿈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많아질 때,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차별이 사라지는 순간 장애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자취를 감출 것이다.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오직 사람, 존엄,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기쁨이다.
나는 믿는다. 그날은 결코 먼 미래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거리에서 목소리를 내고, 누군가는 국회와 시청에서 제도를 바꾸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또 누군가는 곁에서 함께 손을 잡아주고 있다.
우리가 서로의 삶을 외면하지 않고, 가족처럼 함께 책임진다면, 이 사회는 언젠가 단어가 아닌 사람을 먼저 보는 사회가 될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소망이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함께 이루어야 할 약속이다. 그 약속은 단순히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는다. 차별을 없애고 모두가 존엄하게 살아가는 길은 결국 우리 모두의 자유를 넓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차별이 줄어든 사회는 더 따뜻하고, 배제가 없는 사회는 더 안전하다. 장애인을 위한 제도가 확립되면 노인과 아동, 일시적으로 몸이 불편한 이들까지 함께 권리를 누리고 삶의 안전과 편의를 보장받는다. 이는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모두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이자 사회적 책임이다.
나는 믿는다. 이 길은 결코 혼자의 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금도 이어지는 작은 움직임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들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의 결심이다. 차별을 외면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불편을 함께 느끼며 바꿔나가려는 마음. 그것이 모여야 사회는 단어가 아닌 사람을 먼저 보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장애’라는 단어가 역사의 한 페이지로만 남는 날, 우리는 마침내 인간다운 존엄과 진정한 공동체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나의 바람이자, 우리 모두가 함께 이루어야 할 사회적 약속이다.
[배영준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