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자원 화재①-예고된 재앙] '국가 전산시스템 심장부'…예산 부족탓 '단일 집중 구조' 방치
국가 전산망 한곳 집중, 재난에 취약하다는 경고 십수년째 이어졌지만 예산 삭감으로 이중화 시스템 구축 안돼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화재로 600개가 넘는 정부 전산시스템이 멈추면서 국가 디지털 안보의 취약성이 드러났다. 단일 집중 구조와 예산 부족으로 18년간 방치됐던 문제점이 한꺼번에 폭발한 이번 사태는 '예고된 재앙'이었다. 국정자원이 안고 있던 구조적 결함과 화재로 드러난 총체적 부실을 분석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전문가들의 의견을 제시한다.
[뉴스웍스=박광하 기자] 전문가들은 국가정보자원관리원 설립 이후로 십수년간 국가 전산망을 한곳에 집중시키면 재난에 취약하다고 경고했다. 2023년 대규모 장애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았고, 1533억원을 들여 지은 공주 백업센터는 2년 넘게 가동되지 않았다. 예산 삭감으로 이중화 시스템도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배터리 1개의 화재가 국가 전산망 전체를 멈춰 세웠다.
◆20년 전 '효율'만 보고 만든 통합센터
국정자원의 시작은 2005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는 각 부처와 지자체에 흩어진 전산 자원을 한곳에 모아 효율적으로 관리하겠다는 목표로 '정부통합전산센터'를 설립했다. 2002년 10월부터 범정부적 전산환경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혁신방안을 수립했고, 2003년 8월 노무현 정부가 전자정부 로드맵 31대 과제로 확정했다. 2005년 11월 대전에 정부통합전산센터가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정보통신부 소속이었던 이 기관은 2007년 11월 광주센터가 출범하며 직제가 개편됐다. 2017년 7월에는 현재의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고, 행안부 소속 책임운영기관이 됐다. 2023년 6월에는 클라우드 전용 대구센터가 출범했다.
국정자원은 중앙행정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정보시스템과 국가정보통신망 등을 안정적으로 운영·관리하는 기관이다. 일종의 '국가 데이터센터' 역할을 하는 나라 전산망의 심장부로, 대전 본원과 광주·대구 분원 등 3곳에서 약 1600개 국가 전산시스템을 관리한다. 이 중 대전 본원에만 647개 시스템이 집중돼 있다.
국정자원이 관리하는 시스템에는 정부24, 우체국 금융·우편, 국민신문고, 모바일 신분증, 법원 전자소송포털, 인터넷등기소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서비스가 포함된다. 행안부뿐 아니라 국토부, 복지부 등 중앙기관의 주요 시스템들이 모두 이곳에 입주해 있다. 국정자원이 멈추면 국가 행정 전체가 멈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설립 초기부터 제기된 '단일 집중' 우려
국정자원이 설립될 당시부터 전문가들은 우려를 표했다. 국가 전산망을 한곳에 집중시키면 효율성은 높아지지만, 그 곳에 문제가 생기면 전체 시스템이 마비될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화재, 지진, 테러 등 물리적 재난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경고가 반복됐다.
이같은 우려에 정부는 2008년부터 충남 공주시 사곡면에 백업센터 구축을 추진했다. 전쟁·재난·재해·대규모 장애 등 비상사태로 대전·광주·대구센터 기능이 동시에 마비되더라도 국가 전산망이 작동할 수 있도록 '쌍둥이 재해복구(DR) 클라우드 센터'를 짓기로 한 것이다.
공주 백업센터는 직격 핵을 제외한 모든 무기체계에 대한 공격에 견딜 수 있도록 터널 내 전산동을 구축하고, 화생방, 내진, 전자기파(EMP) 차폐 등 특수시설로 방호체계를 갖추도록 설계됐다. 총사업비로 2354억원(건축 1533억원, 정보화 821억원)이 책정됐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사업이 지연되면서 2019년 4월에서야 공사를 시작해 2023년 5월 건물 공사를 마쳤다. 그런데 건물은 지었지만 운영은 시작하지 못했다. 2024년 1차 정보화 예산으로 251억5000만원이 편성되고도 그해 8월까지 예산이 전혀 집행되지 않았다. 2025년 공주 백업센터 예산은 235억원이 감액된 16억1400만원만 편성됐다. 1533억원을 들여 건물을 지어놓고도 2년 4개월 넘게 가동을 못하는 상태가 계속됐다.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2025년도 예산안 검토보고서를 통해 "국정자원 공주센터 신축 사업은 2024년 구축 사업이 총사업비 협의로 지연되고 있다"며 "사업이 추가적으로 지연되지 않도록 집행관리를 철저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냈다. 행안부 계획대로 2025년 9월까지 구축이 완료됐다면 이번 화재에도 불구하고 국가 전산망은 정상 작동할 수 있었다.
◆2년전 대규모 장애에도 교훈 얻지 못해
국정자원의 구조적 문제는 2023년 11월 대규모 장애로 현실화됐다.
네트워크 장비인 라우터의 포트 불량으로 정부 행정전산망이 일주일 가까이 마비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시 대전 본원과 광주 분원을 연결하는 라우터 포트 3개가 불량이었고, 이중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피해가 확산됐다.
2023년 11월 17일 오전 8시 40분경부터 시작된 장애로 지자체 공무원 업무 관리 프로그램인 새올, 온나라, 인사랑, 행복e음 등이 먹통이 됐다. 사흘간 행정복지센터 민원처리 및 서류발급이 불가능했고, 지자체 공무원의 인사, 복지 등 업무가 진행되지 못했다. 무인민원발급기까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시민들이 큰 불편을 겪었다. 금융권에서 사용 중인 정부의 신분증 진위확인 서비스가 원활하지 못하면서 은행 업무가 마비됐다.
당시 행안부는 장애를 인지하고도 9시간 동안 아무런 안내도 하지 않았다. 복구 작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행정전산망의 백업을 위한 데이터가 서버가 아닌 단순 저장장치인 '스토리지'에 담겨 있는 탓에 사람이 직접 백업 데이터를 현재 전산망에 옮겨가며 복구를 해야 해 시간이 훨씬 많이 걸렸다.
행안부는 이후 재발 방지 대책을 발표했다. 노후 장비 교체와 이원화 시스템 구축 등을 담은 종합 대책을 밝혔고, 재해·재난뿐 아니라 장애 상황에서도 작동하도록 '액티브-액티브' 방식의 재난복구(DR) 시스템을 구축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DR 이중화는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 이용석 행안부 디지털정부혁신실장은 이번 화재 이틀 뒤인 27일 브리핑에서 "재난 복구(DR) 시스템이 구축돼 있지만, 큰 규모가 아니라 필요 최소한의 규모로 돼 있거나 데이터 백업 형태로만 돼 있는 것도 있다"고 시인했다.
◆예산 부족·삭감 장기화에 취약점 그대로
국정자원은 예산 부족 문제에도 시달렸다.
보안, 이중화, 백업 등 시스템의 안전을 위한 투자는 비상 시에 확인되는 성격이므로, 평상시에는 투자 효과를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관련 예산은 번번이 삭감되곤 했다는 게 국정자원 관계자들의 하소연이다.
예를 들어 2023년 전자정부 지원 사업 예산은 493억원에서 2024년 126억원으로 74%(367억원) 삭감됐다. 전자정부 유지·보수 예산이 크게 줄었다. 2023년 행정전산망 마비 사태 당시 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은 "모든 게 과거 전산망에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데에 기인한다"고 밝혔지만, 정작 정부는 행정전산망 시스템 관리 예산을 2023년 133억원, 2024년 127억원, 2025년 54억원으로 대폭 삭감했다.
예산 부족, 삭감이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는 화재를 통해 여실히 드러났다. 26일 오후 8시 15분 대전 유성구 국정자원 5층 전산실에서 무정전전원장치(UPS) 배터리 이전 작업 중 54V 리튬이온배터리 1개에서 불꽃이 튀며 화재가 시작됐다. 약 10시간 가까이 이어진 화재로 전산장비 740대와 배터리 384개가 소실됐다.
화재로 직접 손상된 시스템은 96개였지만, 화재 발생 후 항온항습기가 고장나 전산실 온도가 계속 올라가자 국정자원은 서버 과열로 인한 추가 손상을 막기 위해 나머지 577개 시스템까지 모두 끄는 '선제적 셧다운'을 단행했다. 냉각 시스템 마비가 대전 센터 전체를 멈추게 만들었다. 결국 정부 업무시스템 647개가 일제히 멈췄다.
우체국 금융·우편, 정부24, 국민신문고, 모바일 신분증 등 국민 생활과 직결된 서비스가 대거 마비되면서 추석 연휴를 앞둔 시점에 전국적 혼란이 빚어졌다. 정부는 위기경보 수준을 '심각'으로 격상하고 위기상황대응본부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로 전환했다. 전산장애로 중대본이 가동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5년 국정자원이 설립된 이래 18년간 반복됐던 '단일 집중 구조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현실이 됐다. 예산 부족을 이유로 미뤄졌던 백업센터 구축,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재해복구 시스템, 2023년 사태 이후에도 개선되지 않은 이중화 체계 등 모든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결과, 국가 전산망의 심장부가 배터리 1개의 화재로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