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李대통령 '억강부양' 금리 역차별, 잔인한 금융불평등 해법일까
얼마 전 이재명 대통령이 저신용자일수록 높은 대출 금리를 요구하는 금융권을 항해 '가장 잔인한 영역'이라며 모진 소리를 했다. 시중은행부터 지방은행, 저축은행, 지역의 서민금융기관까지 이자 장사를 본업으로 하는 금융기관에 대한 이 대통령의 뿌리 깊은 불신과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낸 발언이다.
그 바탕에는 대금업은 본질적으로 약탈적이라는 인식이 깔려있는데 이 대통령만의 독특한 철학은 아니다.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이자를 받는 것 자체가 부당하며, 사회 정의에 어긋난다는 인식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중세 기독교는 대금업을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행위로 죄악시하여 이자를 금지했고, 이슬람은 지금도 예금과 대출거래에서 이자를 금지하고 있다.
이렇듯 역사적으로 대금업은 늘 사회적 혐오 대상이자 시민의 고혈을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로 취급받았다. 은행이 고소득 '신의 직장'으로 부러움의 대상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의 은행시장 과점체제가 완성된 2000년대 중반부터라 할 수 있다. 동북아 금융 허브론을 내걸고 '돈 넣고 돈 먹는' 금융업을 정부 차원에서 재테크 산업으로 육성하기 시작한 때와 맞물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자가 부당한 착취라는 부정적 인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과거와 다른 점은 은행의 이자 장사 자체보다는 이자율 수준이 부당한 착취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이자율의 부당함에 판단은 누가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이자는 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에 대한 대가다. 차주의 신용위험에 따라 이자율이 달라진다. 똑같은 상품인데 구매자별로 지급하는 가격이 다른 것이 신용거래 시장의 고유한 특징이다.
신용이 낮을수록 대출 금리나 채권 금리가 높은 것은 금융시장을 지배하는 기본 원리 중의 하나다. 신용시장에서 고위험-고수익, 저위험-저수익의 가격 원리는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아무도 잔인하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즉, 개별 차주의 부도 위험에 따라 가격을 차등화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정당하다. 사회적으로 해악을 끼치는 은행의 부당 행위는 신용위험에 따른 가격 차별이 아니다.
그것과 정반대로 상환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득을 챙기는 약탈적 대출, 신용위험이 아니라 신분과 지위에 따라 가격을 차별하는 불공정 대출이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사태처럼 대부분의 은행 위기는 당장 눈앞의 고수익을 좇아 신용위험을 무시하고 대출을 남발한 것에서 기인한다. 반대로 은행이 극도로 위험을 회피한다면 저신용자의 금융 배제를 더욱 심화하여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을 키운다.
이러한 이중적 시장실패 상황은 신용위험에 따른 가격 차별 원리를 지키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과도한 위험추구와 과도한 위험회피의 양극단 사이에서 은행이 스스로 균형을 찾아 나서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공정대출법, 약탈적 대출 금지법, 이자제한법과 같이 채무자 보호를 강제하는 채찍을 가하든, 저신용자의 금융 배제를 완화하기 위해 정책금융이라는 당근을 제공하든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하다.
이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고신용자에게는 저리로 장기·고액 대출을 해주면서, 저신용자에겐 고리로 소액·단기 대출을 제공"하는 금융시장의 가격 차별이 사회적으로 공정한가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공익과 사회 정의, 윤리적 관점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문제의식에는 공감을 하지만, 대통령이 제시한 해법, 즉 "초우대 고객의 초저금리에 0.1%라도 더해 이를 저신용자 지원 재원으로 활용하자"는 것에 동의하기 어렵다.
저신용자라는 이유만으로 더 많은 금리를 강요하는 것이 부당하다면, 고신용자라는 이유로 금리를 더 올려받는 것도 온당치 않다. 정부가 은행의 팔을 비틀기 전에는 은행과 차주 간 사적 계약에 '억강부약의 공동체 원리'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자가 은행의 팔을 비틀어 정책서민금융·상생금융 재원으로 가져다 쓰는 것이 일상이 된지 오래라 막을 방법은 없다. 공익을 추구하는 정책금융이나 재정융자 사업에서는 신용시장의 가격 차별 논리를 거꾸로 뒤집은 저신용-저금리 대출을 지원할 수 있다.
문제는 보증이든 이차보전이든 저신용-저금리 정책대출을 늘릴수록 부실률과 대위변제율도 같이 높아진다. 대표적 사례가 이 대통령이 경기지사 시절 신용등급 최하위 10%에 최저금리(1%)로 만기 5년의 소액(최대 300만원)을 대출하는 재정융자 사업이다.
만기가 지나도 빚을 갚지 않은 사람이 4명 중 3명이라는 처참한 결과는 사실 예견된 일이었다. 대마불사 은행 위기의 비용을 사회 전체가 부담하는 것처럼 고위험-저금리 정책대출의 손실도 전부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시혜적 복지와 금융을 혼합한 저금리 대출 지원은 시장 왜곡을 심화할 뿐 아니라 약자 보호의 사회적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빚을 권하는 것이야말로 약자의 목을 죄는 약탈적 대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금융 불평등은 신용위험에 부합하는 가격 책정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시장 환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담보대출과 보증서 대출로 땅 짚고 헤엄치는 시중은행의 극단적 위험회피 행태가 그 중심에 있다.
거기에 더해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날로 늘어가는 정책서민금융과 보증지원은 신용위험을 따지지 않은 민간 은행의 '묻지마 대출'을 떠받치는 든든한 기둥으로 역할을 하며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생한다.
복지와 금융을 뒤섞은 정책금융이 민간 은행의 시장실패를 더욱 악화하는 악순환이 정권 대대로 이어지고 신용위험을 무시한 약탈적 대출, 사회적 지위에 따른 차별, 관치금융과 정치금융이 판치는 환경에서 정상적인 신용시장은 요원한 꿈이다.
[조혜경 경제민주주의21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