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명품 제일주의 확산, 기성세대가 책임져야 한다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며칠 전 일이다. 늦은 퇴근길 다소 한산한 버스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데 맨 뒤에 앉은 교복 입은 여학생들의 낮은 톤의 대화가 들린다. 버스 안이 평소보다는 비교적 조용하다 보니 '디올', '샤넬', '에르메스' 같은 명품 브랜드 관련 키워드들이 귀에 쏙쏙 박혀 온다. 대충 맥락을 파악해 보니 '오픈런'을 위해 강남 소재 모 명품 매장 인근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잡자는 내용이다.
물론 다른 목적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필자도 처음 들어보는 명품 브랜드들의 제품명들을 일일이 나열한다는 것 자체가 낯설게 느껴진다. '집안이 좀 사나'라는 생각과 동시에 말로만 듣던 국내 젊은 층 가치관 전환의 물결을 몸으로 맞은 것 같아 전율이 흐른다.
최근 수년간 지속된 경기 침체와 저성장 국면에도 국내에서는 20~30대 젊은 층의 명품 구매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저성장 및 경기 침체는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구찌 및 버버리, LVMH그룹(디올·루이뷔통)도 글로벌 매출 하락을 견디다 못해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판에 한국만큼은 불황 무풍지대다.
그나마 희소성 전략을 내세운 에르메스 정도가 유일하게 두 자릿수 매출 성장을 기록하며 독주 중인데, 그 원동력은 한국 최상위 계층 수요라고 한다. 샤넬이나 디올 같은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괜히 한국 인기 걸그룹 '블랙핑크' 멤버를 엠배서더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독특한 소비 심리와 경제 환경이 결합한 '불황 속 소비 양극화'가 진행 중이다. 모 언론보도에 따르면 명품을 처음 접하는 시기는 20대 직장인(45.6%)과 대학생(35.8%)에 이어 고등학생(26%) 순으로 빨라졌다고 한다. 유럽 등 젊은 층에서는 돈 없어서 못 산다고 쳐다도 보지 않는 명품 매장 앞을 한국에서는 개점 시간 전부터 대기 줄이 발생한다.
현재 한국 젊은 층의 가치관이 과거에 비해 성숙하지 못해서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현재 대한민국 청년층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는 집값과 낮은 연봉 상승률, 불투명한 노후 걱정에 시달린다. '아무리 아끼고 모아도 큰 자산을 형성하기 어렵다'는 좌절감을 시청률과 조회수에 초점을 맞춘 대중매체나 유튜브 콘텐츠를 통해 과거보다 일찍 깨우친다.
따라서 과거처럼 저축이나 속칭 '짠테크(짠돌이+재테크)'를 통한 미미한 자산 증식보다, 당장 큰 만족을 주는 명품 소비에 집중하는 것이 삶의 효율을 높인다고 판단하게 된다. 우울한 현실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 심리는 명품 구매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코로나19 팬데믹은 그간 억눌렸던 소비 심리를 한꺼번에 배출시켰다. 명품 보복 소비는 이제 습관적인 보상 패턴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또한 소셜 미디어(SNS)가 발달하면서 타인의 명품 소비를 일상적으로 접하니 상대적 박탈감과 모방 소비 욕구도 커졌다. 이제 한국 젊은이들에게 명품이란 한 끼 정도 굶고, 월세에 살아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트렌디함을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드러내는 수단이 된 것이다.
일부 젊은 층은 오히려 명품 구매를 재테크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눈에 띈다. 에르메스나 샤넬, 특정 인기 브랜드의 한정판 모델은 시간이 지나도 가치가 하락하지 않고, 한국 사회 특수성으로 오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자포자기에 기인한 젊은층의 과도한 명품 소비를 어떻게 막겠는가. 국내는 엄연히 시장경제 시스템이 돌아간다. 기성세대의 실수와 간과, 이기심으로 빚어진 명품 소비 풍조를 억지로 억누를 수도 없다.
젊은 층의 자포자기 심리를 조금이나마 완화하고, 소비를 더 건강하고 미래 지향적인 방향으로 돌리는 인식 전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도록 정책 및 사회적 시스템을 지금이라도 만드는 것뿐이다.
이런 좌절감의 근본은 역시 주거 안정성이다. 첫째로 청년층에게 현실적인 수준의 주거비 지원 확대 및 공공 임대주택 공급 증대 방안이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논의돼야 한다. 소위 '금수저'가 아닌 실수요자들을 추려내 대출 규제를 완화하고, 이자 부담을 경감할 수 있는 정책을 제시해야 한다.
둘째로 소비가 아닌 저축과 투자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학교 및 사회 진출 초기에 실용적인 금융 및 자산 관리 교육을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청년 우대형 상품 등 장기 저축 및 투자에 대한 세제 혜택 확대도 한 방법이다.
셋째로 젊은층이 자주 접하는 대중매체 등을 통해 ‘내면의 성장’과 ‘경험’ 등 비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대중 캠페인 및 콘텐츠를 주로 제작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SNS상에서도 접할 수 있는 과시적 소비 관련 콘텐츠를 지양하고 자수성가하거나, 자신만의 신념을 실현한 같은 세대의 성공 사례를 공유하는 방식이다.
요는 '나도 티끌을 모으면 태산을 만들 수 있다'의 가능성을 시각적으로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스템과 정책 변화만으로 가치관 전환의 큰 물결을 모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시간은 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이 이어진다면, 언젠가는 뒤 세대에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전달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