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2.23 16:44

보통은 아전(衙前)의 동의어로 쓰이는 말이 서리(胥吏)다. 중앙과 각 지방 행정부서에서 말단의 업무를 처리하는 사람이다. ‘아전’이라는 단어는 관아(官衙)를 가리키는 衙(아)에 ‘앞’을 가리키는 前(전)을 붙여 관공서에서 실무를 담당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로 풀 수 있다. ‘서리’는 오랜 동양 정치체계 속에서 실무자를 가리켰던 胥(서)와 하급 직원인 吏(리)의 합성이다.

이들은 보통 문서 작성, 공문서 옮겨 적기, 죄인의 압송이나 형 집행, 문서 전달 등의 온갖 행정에 필요한 실제 업무를 맡았던 사람들이다. 호칭은 매우 다양하다. 비교적 직급이 높은 서리를 가리키는 말로 녹사(錄事), 문서 행정을 주로 담당하는 서리(書吏), 아주 보잘 것 없는 일인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조례(皁隷), 죄인 다루는 일을 맡은 나장(羅將)이 있다.

자신의 출신 지역에서 아전의 일을 맡은 사람은 향리(鄕吏), 바깥 지역에서 들어와 그런 일을 맡아 하는 사람은 가리(假吏)로 구별했다고 한다. 특정한 군사(軍事) 분야의 일을 맡기기 위해 별도로 선발한 사람들은 차비군(差備軍)이라고 했다.

이방(吏房), 호방(戶房), 형방(刑房)이라는 단어도 눈에 띈다. 지방 관아에서 실무를 집행하는 모든 아전의 각 영역 별 우두머리를 일컫는 말이다. 이방은 지방 관서의 인사 관계 업무를 총괄했다고 한다. 호방은 세수(稅收)를 담당하는 영역의 업무에 종사하는 아전들의 수장이다. 형방은 법률관계의 일, 나아가 형의 집행 등을 맡은 아전의 대표다.

이들 이방과 호방, 형방은 보통 삼공형(三公兄)으로 불렀다고 한다. 지방 관아의 밑바닥 실무를 총괄하는 사람이니 나름대로 높여서 부를 필요가 있었던 모양이다. 중앙에서 과거 등을 통해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이 보통 수령(守令)으로 지방에 부임하지만 실무 능력은 매우 뒤떨어졌다.

지방 현지 사정에 어두울 뿐 아니라 각종 문서의 작성에서도 각종 기이한 부호와 단어, 표기법 등이 쓰이는 아전들의 바탕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중앙에서 내려와 현지에 부임한 수령은 대개 이들 ‘삼공형’에 의존하는 정도가 심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번지는 일이 아전들의 횡포다. 이는 같은 유형의 관제(官制)를 유지했던 한반도와 중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는 설명이 있다. 지방관을 속여 제 잇속을 채우는 일이 많았고, 각종 민원(民怨)이 집중적으로 모여드는 영역이었다는 것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조선의 조식(曹植)은 “우리나라는 이 이서(吏胥: 서리, 아전) 때문에 망한다”는 한탄을 했고, 조선 후기의 정약용(丁若鏞) 등은 아전의 횡포에 따른 폐해를 시정토록 강력하게 건의했다는 기록도 있다. 중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정식 과거를 통해 벼슬자리에 오른 사람을 관(官), 하급 실무를 담당한 아전을 吏(리)로 적은 뒤 “큰 물고기인 관원을 따라 다니는 아전들은 작은 물고기…아전은 고양이처럼 백성의 고혈을 살금살금 핥아 먹는다”고 적고 있다. 사법체계를 조종해 백성으로부터 재물을 갈취하고, 각종 뇌물 수수에 간여하는 정도가 극심했다는 점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들 아전이 새삼 떠오르는 이유는 요즘의 사태 때문이다. 대통령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해 오늘의 탄핵사태에 이른 데는 청와대 참모들의 책임이 아주 크다. 대통령의 ‘일탈’을 알면서도 제 직을 걸고 직언 한 번 제대로 한 적이 없는 참모들이다.

어엿한 학력에 내로라하는 국가고시를 통해 관원 자격을 획득한 과거 ‘벼슬아치’라고 이들을 볼 수 있지만, 대통령 주변에 포진해 옳고 굳은 자세 한 번 보인 적이 없다. 그저 하라면 하고, 말라면 말았다는 정황이 쏟아져 나온다. 그럼에도 뉘우침은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고시 패스한 머리로 법률에 기대 모르쇠로 일관하거나 법망을 이리저리 빠져나갈 궁리만 거듭한다. 실무에 아주 밝아 위로는 제 수령을 속이고, 밑으로는 백성의 고혈을 쥐어짰던 동양의 과거 아전들과 닮아도 아주 닮은 모습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은 아전 중의 고위급 책임자였으니 녹사(錄事)로 적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민정수석은 인사와 법률에 관여하는 직무이니 이방(吏房)과 형방(刑房)의 업무를 부분적으로 겸임한 자리다. 과거의 ‘삼공형(三公兄)’에 해당하는 사람이겠다. 이런 이들이 권부의 정점에 포진해 우리의 행정체계를 쥐락펴락했으니 대한민국은 어쩌면 서리, 또는 아전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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