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한동수기자
  • 입력 2015.11.22 16:31

대한민국 정치사에 명과 암이 가장 뚜렷하게 갈리는 대통령.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검은 돈을 뿌리뽑겠다며 임기 초 전격 단행한 금융·부동산 실명제 실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기에 가능했다는 평가가 나 올 정도다. 문민정치의 시대를 연 그는 육군내 조직된 파벌인 ‘하나회’를 척결했고 전임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결단을 내리기도 했다. 임기 후반 동·서 냉전 종식의 시기, ‘세계화’라는 기치아래, 시기상조라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한국을 가입시키기도 했다. 임기말 무리한 시장개방정책은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 도산과 맞물려 국제통화기금(IMF)구제금융 사태로 이어졌다. 게다가 차남 김현철씨의 비리 사건 까지 겹쳐 결국 그는 임기말 국민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1993년 취임식때 혈기 왕성해 보이던 그의 헤어스타일도 임기종료 시점인 1998년 백발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8월12일 긴금 담화를 통해 부패척결을 위해 '금융실명제'를 도입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功]김영삼이기에 가능했던 금융·부동산 실명제

1993년 8월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를 넘어섰다. 김 전 대통령은 긴급 담화를 통해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그는 “금융실명제없이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경제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결단이었다. 은행 예·적금의 실명제 실시로 비자금이 부동산에 몰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1995년에는 부동산 실명제까지 도입,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을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가명이나 차명 계좌 및 부동산 등기를 일절 금지시키는 조치였다. 비자금과 얽히고 설켜있던 과거 정부에선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는 게 당시 정관계의 평가였다. 김영삼이기에 가능했다는 평가도 이 때 쏟아져 나왔다.

◆[功]선진국 진입 열망... OECD 가입으로 이어져

1996년 12월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사진:당시 MBC뉴스데스크 캡쳐>

대한민국이 세계 무역 흑자국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90년대 중반, 김 전 대통령은 정부 규제를 완화해 경제 활성화 지원에도 앞장 섰다. 기업의 창업과 공장입지조성 및 자금 조달의 문턱을 간소화 시키고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구 소련이 해체되고, 천안문 사태후 중국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통일 독일의 등장 등 90년대 중반은 변화의 바람이 전세계적으로 거세게 불던 때다.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제1과제를 ‘세계화’에 두고 적극적 시장개방 정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1996년 12월 대한민국은 전 세계 선진국들의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다. 경제 규모를 더 키운 후 가입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설득은 김 전 대통령앞에서 통하지 않았다. 그의 강력한 의지로 성사된 OECD가입은 이후 대한민국이 경제적 시련을 겪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15년 현재 대한민국은 OECD내에서도 주요국가로 성장했고, 역사에는 OECD가입이 그의 업적으로 기록될 것이라는데 큰 이견은 없다.

◆[過]김영삼의 ‘세계화’...국가 부도사태로 이어져

김영삼 대통령은 1997년 12월11일 청와대에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에 들어간데 대해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며, '지금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할 때'라는 요지의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사진=문광부e-영상역사관>

OECD가입 후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희망이 가득했던 1997년의 새해가 밝자마자, 이상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 해 1월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 계열 한보철강이 5조원대의 부도를 냈다. 4월에는 삼미그룹, 7월에는 기아자동차의 도산이 잇따라 발생했다. 뿐만아니었다. 중견기업인 쌍방울그룹, 해태그룹,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쓰러졌다. 기업의 도산은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부도난 기업의 금융권 여신은 30조원을 넘어섰다. 해외 금융기관은 부채상환을 요구했고 외환보유액은 바닥이 났다. 무리한 경제개혁과 개방이 나은 후유증치곤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 부도사태가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지원으로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사태는 모면했으나, 국가 경제 주권을 IMF에 넘겨주는 처참한 상황에 이르렀다. 김 전 대통령 임기 중 경제부총리는 6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재임기간이 1년도 되지 않았다.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을 기대하긴 힘들었다. 준비가 부족했던 시장 개방정책은 경제 위기를 자초했다는 평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그의 과(過)였다. 그는 임기 말 박수를 받으며 청와대를 떠나지 못했다.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고 국민 앞에 고개 숙였다. 그는 대통령 임기를 개혁으로 시작해 대국민 사과로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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