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동호기자
  • 입력 2017.12.29 15:45
<사진=김근태 재단 홈페이지 캡쳐>

[뉴스웍스=김동호기자]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1947.2.14 ~ 2011.12.30)이 별세한 지 6년이 지난 오늘, 서울 도봉구 창동성당에는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대표 등 정치 동지들이 모여 그를 기리는 추도미사를 진행했다.

이날 추도미사에는 추 대표를 비롯해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안희정 충남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손학규 국민의당 상임고문등도 자리를 같이 했다.

반면,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이 날 당내 일정등을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

이날 故 김 전 고문의 6주기를 맞아 그의 민주화를 향한 인생 역정이 다시 한번 주목되고 있다. 

故 김 전 고문은  과거 군부 정권 당시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의 민주화운동의 시작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지난 19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부정선거로 규탄하는 시위를 이끌다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입대했다. 1970년 만기 제대한 그는 복학한 뒤에도 학생운동을 계속하였으며,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수배되어 첫 번째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후에도 1975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는 등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할 때까지 7년 넘게 수배자 생활을 했다.

그의 민주화 항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80년 등장한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하고 초대 의장을 맡으며 또 다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다.

이 과정에서 1985년 8월 서울대 민주화추진위 배후 조종 혐의로 연행돼 '고문 기술자' 이근안에게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이 당시 당한 고문의 후유증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괴롭혔다. 

지난 2012년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는 이와 같은 故 김 전 고문을 실제 모델로 하고 있다.

그는 1989년 1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결성을 주도하고 정책기획실장과 집행위원장을 맡아 활동 중 1990년 노태우 정권에 의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또 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었다.

1992년 석방된 그는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에 몸을 담았다.

이후 1996년 제15대 총선부터 17대 총선까지 서울 도봉갑 지역구에서 3선에 성공했으며 노무현 정부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그가 이전 받았던 고문의 후유증은 파킨슨병으로 이어지며 지난 2011년 12월 30일 뇌정맥 혈전증 치료 중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한편, 그의 부인인 인재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故 김 전 고문이 사망한 후 지난 2012년 총선에서 도봉갑에 출마하며 정치권에 입문해 지난 19대 총선에서도 당선되며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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