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3.08 10:39
작은 멧돼지의 모습이다. 흔히 동물을 축생(畜生)으로 적는다. 일본에서는 큰 욕에 해당한다. 사람의 탈을 썼으나 그 속은 동물만 못한 사람이 많다. 그런 이들을 일컫는 욕이 '축생'이다.

우리는 불교 용어로 알고 있다. 윤회(輪回)의 긴 여정 속에 있는 여섯 갈래 길, 즉 육도(六道)의 하나로 말이다. 축생(畜生)이라는 단어 자체의 뜻은 ‘짐승(畜)으로 태어남(生)’이다. 불교에서는 네 발 또는 두 발 달린 땅 위의, 또는 공중을 나는 날짐승, 심지어는 온갖 벌레와 수중 동물을 이 범주에 집어넣는다.

불교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생명을 부여받고 태어나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육도의 윤회 중 畜生의 길에 접어든다고 가르친다. 악업(惡業)을 짓지 말고 선업(善業)을 쌓으라는 게 가르침의 요지다. 요즘 애완동물의 처지가 제법 괜찮다고는 하지만, 그로 태어나라고 한다면 기꺼이 나설 사람 누가 있을까.

한자의 쓰임에서 이 畜生의 앞을 거슬러 오르면 먼저 눈에 띄는 단어는 축산(畜産)이다. 우리가 짐승을 길러 생업으로 삼는 그런 축산업(畜産業)의 뜻이 아니다. 말 그대로 풀자면 ‘짐승(畜)이 낳은(産) 것’ ‘동물로부터 나온 X’의 뜻이다. 중국 동한(東漢 AD 25~220년) 때라고 한다.

당시의 한 고관이 자신의 머슴을 불렀으나 그 머슴이 저자에 나가 술을 먹고 돌아오지 않자 그를 그렇게 호칭했다는 일화에서 전해졌다고 한다. 신분은 낮으나 버젓한 사람에게 ‘짐승이 낳은 녀석’이라고 했으니 그는 당시로서는 꽤 모멸스런 욕이었을 테다.

불교가 중국 땅에 본격 뿌리를 내리기 전이었으니 이는 윤회의 길 가운데 하나인 畜生에 비해서는 앞섰던 조어(造語)에 해당한다고 봐야 좋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이는 엄연한 욕이다. 한자를 우리 언어 속에 끌어들였던 한반도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에게 “에이, 이 축생아~”라고 하면 그는 곧 “예라, 이 짐승아~”라고 하는 일과 같다. 어느 경우든 좋은 뜻으로 쓰일 수 없다.

이 욕을 가장 자주 쓰는 곳은 사실 일본이다. 畜生의 일본 발음은 ‘칙쇼 ちくしょう’다. 스스로 ‘빌어먹을…’이라며 자탄할 때, 혹은 ‘저 짐승…’ ‘개XX’라며 남을 욕할 때 흔하게 쓰는 단어다. 욕설이 별로 발달하지 않은 일본이지만 이는 대표적인 욕에 해당한다.

요즘 다수의 일본인들이 이 욕을 입에 담고 살지 모른다. 과거의 침략 역사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자국의 못난 정치인들을 보면서 ‘빌어먹을…’이라며 끌탕 칠 때, 아니면 직접 그런 못난 극우 정치인들을 가리키면서 말이다. 그냥 내 희망에 불과할까.

불교에서는 畜生의 특징을 ‘괴로움이 많고 즐거움이 적으며, 성질이 사납고 무지하며, 식욕과 음욕이 강하다’고 꼽는다. 이 모두는 짐승이 제 스스로를 살피는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현상일 테다. 제 잘못 살피지 못하는 존재는 곧 짐승이니, 과거의 잘못을 거꾸로 뒤집으려는 일본의 극우 정치인들에게는 畜生이 딱 어울리는 단어다.

 

<한자 풀이>

畜(짐승 축, 쌓을 축, 기를 휵): 짐승, 가축. 개간한 밭. 비축(=蓄), 쌓다, 모으다. 쌓이다, 모 이다.

 

<중국어& 성어>

畜生 chù shēng: 우리의 쓰임새와 거의 같다. 대상을 ‘짐승’으로 표현할 때 쓴다. 욕설이다.

畜牲 chù sheng: 위와 통용하는 단어다.

牲畜 shēng chù: =가축(家畜 jiā chù)

六畜不安 liù chù bù ān: 소, 말, 양, 돼지, 닭, 개를 여섯 가축인 육축(六畜)으로 부른다. 이런 가축들이 소란스러워지는 일(不安), 즉 소요나 전쟁 등으로 환경이 편하지 못한 시절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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