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장진혁 기자
  • 입력 2020.08.26 11:36

10년 내다보고 준비한 끝에 SK를 직물회사에서 세계 일류 그룹으로 성장시켜

폐암수술을 받은 고 최종현(왼쪽 두번째)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제공=SK)
폐암수술을 받은 고 최종현(왼쪽 두번째)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위기 극복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제공=SK)

[뉴스웍스=장진혁 기자] SK그룹이 26일 고(故)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의 22주기를 맞아 별다른 행사없이 조용히 고인을 추모한다.

SK는 이날 별도의 그룹 차원의 행사를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기존에는 최태원 회장을 비롯한 주요 경영진들이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 선영에 모여 추모식을 했지만 2018년 이후로는 4월 8일 SK창립기념일에 최종건, 최종현 회장의 추모 행사를 통합해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없는 상황이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최종현 회장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원대한 꿈을 치밀한 준비와 실행력으로 현실로 만든 기업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자본, 기술, 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천명했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인데, 많은 이들이 '불가능한 꿈'으로 치부했다.

최종현 회장은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부터는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뚝심있게 사업을 추진,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최종현 회장은 미래설계가 그룹 총수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산업동향 분석을 위해 1984년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세운 이유다. 이후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은 최종현 회장은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앞선 준비 끝에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지만 특혜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 "준비한 기업에는 언제든 기회가 온다"고 내부를 설득한 최종현 회장은 실제로 2년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원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지만 최종현 회장은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고 설득했다.

최종현 회장이 남긴 경영 DNA는 장남 최태원 회장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최종현 회장이 항상 10년을 내다보고 준비한 끝에 SK를 직물회사에서 석유화학과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그룹으로 성장시켰다면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등을 통해 반도체와 바이오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최태원 회장은 하이닉스 인수 직후 "하이닉스가 SK 식구가 된 것은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는 의미가 있다"면서 30년 전 최종현 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언급했다. 최종현 회장이 1978년 미래 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선경반도체를 설립했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던 과거를 회상한 것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 시절인 1997년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 병마와 싸울 때도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경제 살리기를 호소했던 최종현 회장은 1998년 8월26일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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