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5.18 16:26
조선의 사상가이자 큰 정치가였던 율곡 이이가 태어난 강릉시 오죽헌(烏竹軒)의 모습이다. 그는 당대에 가장 필요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 그에 힘을 기울이자고 역설한 정치인이다. <사진=한국관광공사>

우리 역사책을 들추다보면 가끔 눈에 띄는 단어가 시무(時務)다. 율곡 이이(李珥)가 이 말을 사용했고, 그에 앞서 고려의 최승로(崔承老)도 같은 단어를 썼다. 이들이 사용한 낱말의 뜻은 ‘때에 맞춰 힘써야 할 일’이다.

이 말이 드라마틱하게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유비(劉備)와 제갈량(諸葛亮)이 등장하는 <삼국지(三國志)>에서다. 형주(荊州)의 유표(劉表) 밑에서 더부살이를 하던 유비(劉備)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찾아 나섰던 ‘컨설턴트’는 사마휘(司馬徽)였다.

천하를 품에 안겠다는 뜻을 지녔으나 남에게 의지해 살아가고 있던 유비가 새로운 국면을 열어보겠다는 의지를 실천에 옮겼던 때다. 그러나 유비를 맞이한 사마휘는 “글이나 끼적거리는 사람이 뭘 알겠느냐”며 제갈량(諸葛亮)을 추천한다.

사마휘의 발언을 적은 기록에는 “때에 맞춰 힘써야 할 일을 아는 사람이 천하의 준걸(識時務者在乎俊杰)”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그 둘에 앞서 춘추시대 안영(晏嬰)도 같은 맥락의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아무튼 유비는 마침내 제갈량을 찾아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공을 들여 결국 큰 계책을 얻는다. 바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유비는 천하를 통일하겠다는 거창한 지향을 잠시 거두고 제갈량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여 지금 쓰촨(四川)의 땅으로 들어가 촉한(蜀漢)을 세운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다. 인력과 물적 자원 모두 부족했던 유비가 상황의 묘를 살리지 못하고 그저 기약 없는 천하통일만을 꿈꿨다면 하찮은 몽상가에 불과했을 것이다.

이 시무에 관한 기록은 고려와 조선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른바 ‘시무책(時務策)’의 이름을 달고서다. 고려 왕조의 기틀을 다진 임금은 성종(成宗)이다. 그에게는 최승로라는 걸출한 신하가 있었다. 그가 임금 성종에게 올린 건의가 하나 있다. ‘시무 28조(條)’다.

유교(儒敎)의 통치이념에 따라 굳건한 왕조의 기틀을 다진 임금 성종의 업적과 최승로의 ‘시무 28조’는 맥락을 함께한다. 고려의 출범, 이어 펼쳐졌던 어수선했던 정돈의 과정을 거친 뒤 다시 장기적인 통치 기반을 만들기 위해 행해야 할 사안들을 언급한 내용이다.

조선의 율곡 이이는 ‘식시무(識時務)’라는 글을 썼다. ‘가장 필요한 일이 뭔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의 제목이다. 그는 왕조의 창업(創業)이 수성(守成)을 거쳐 어느 정도 폐단이 쌓이는 상황에 도달하면 이를 혁신하는 경장(更張)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내용을 역설했다. 그를 깨닫는 일이 바로 ‘식시무(識時務)’라고 했다.

지금의 국방장관 격인 병조판서 자리에 오르기도 했던 이이는 “천민과 노비 중에서도 인재를 뽑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양반과 상민을 엄격하게 차별했던 조선왕조의 사정을 감안하면 아주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국방력이 형편없었던 조선의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장 힘을 들여 해결해야 할 일을 묻는 것은 지당하다. 그를 제대로 알지 못해 때를 놓치면 닥치는 상황은 어려움 그 자체다. 우리사회의 경쟁력 전반이 곳곳에서 경보음을 내고 있다. 경제사정이 매우 어렵고, 사회 시스템의 개혁도 산적해 있다.

이런 마당에 하염없이 내분에 휩싸이는 여당의 작태가 한심하다. 꼭 해야 할 일은커녕 꼭 하지 말아야 할 일만 골라 하는 모양새다. 다음 총선에서 유권자들의 ‘시무(時務)’는 뻔하다. 지금 여당 의원들과 같은 무능력, 무책임 후보자를 뽑지 않는 일이다. 그나저나 정말 큰일이다. 이들에게 4년의 임기를 덜컥 맡겨 버렸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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