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안윤해 기자
  • 입력 2022.04.05 13:05

[뉴스웍스=안윤해 기자] '2600억원.'

평범한 직장인 수십명이 평생 월급을 모아도 손에 쥐기 힘든 이 숫자는 새해 벽두부터 시작돼 3월까지 집계된 대형 횡령 범죄의 피해 금액이다. 상장 기업부터 공공기관까지 예외없이 공금 빼돌리기가 횡행하고 있다. 이같은 범죄의 동기는 대체로 '한몫 챙기기'이다. 

마음만 먹으면 적게는 수십억원부터 많게는 수천억원에 이르는 돈을 횡령할 정도로 회계관리 체계는 허술했다. 상장기업에서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이런 범죄를 예방할 대책 마련이 신통치 않다보니 이대로 간다면 앞으로도 애꿎은 피해자들이 속출할 지경이다.

오스템임플란트의 전 재무팀장 이모씨(45)는 허술한 시스템을 틈타 지난해부터 8차례에 걸쳐 회삿돈 2215억원을 빼돌렸다. 서울 강동구청 7급 공무원 김모씨(47)는 115억원 상당의 시설건립 자금을 횡령했으며, 계양전기의 재무팀 대리 김모씨(35)도 246억원어치를 횡령한 혐의를 받고 있다. 불과 2주 전에는 LG유플러스 영업직원이 회삿돈 수십억원을, 화장품 업체 클리오 직원이 22억원을 빼돌리는 사건도 잇달아 발생했다.

연이은 횡령 범죄는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 '빚투(빚내서 투자) 열풍'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초저금리 시대를 맞아 단순 근로소득으로는 자산을 불릴 수 없다는 인식과 한탕을 노리는 사회적인 투기 열풍이 강해지면서 공금에까지 손을 뻗친 셈이다. 실제로 오스템임플란트의 전 재무팀장은 빼돌린 회삿돈의 대부분을 주식에 투자해 수백억원대 손실을 냈다. 강동구청 공무원은 횡령한 공금 115억원을 주식 투자에 사용했으며, 계양전기 직원도 횡령액의 상당수를 주식·코인·도박 등에 탕진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막대한 피해에 비해 횡령에 대한 사법부의 처벌 수위는 여전히 솜방방이 수준이다.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권고하는 양형 기준에 따르면 횡령액 50억원 이상 300억원 미만은 징역 4~7년 사이, 가중 시 5~8년이다. 횡령액이 300억원 이상일 경우에는 기본 5~8년이며 최대 7~11년이다. 하지만 300억원 이상은 권고형 기준이 형량의 최대치에 해당하기 때문에 횡령범들은 회삿돈을 훔치고 얻는 경제적 이득이 법적 책임에 비해 월등히 높다고 계산하는 셈이다.

이같은 징역형 수준이 범죄 예방 효과가 있을 지도 의문이다. 더구나 모범수로서 형기의 3분의 1 이상을 채우면 가석방 대상이 된다. 현재 법무부는 형기의 50%를 채운 재소자부터 가석방 심사대상에 올리고 있다. 형사범죄에 비해 경제범죄에 대한 처벌 수준이 낮다고 인식되는 여건에선 횡령이란 유혹에 넘어가는 임직원들이 계속 나올 가능성이 높다.

허술한 내부통제 시스템과 감시 체계는 더 큰 문제다. 바늘 도둑을 잡지 못해 소 도둑으로 키웠기 때문이다. 오스템임플란트 자금관리 직원의 초기 횡령금은 450억원이었으나, 투자 손실이 나자 횡령 규모를 늘리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했다. 계양전기 직원은 6년 동안 은행 잔고증명서에 맞춰 재무제표를 조작하는 등의 수법으로 오랜 시간 회삿돈을 빼냈다. 직원이 회삿돈을 내돈 쓰듯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만큼 관리감독이 허술했다는 뜻이다.

횡령이 발생한 상장사의 소액주주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피해가 고스란히 개인 투자자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만큼 기업 상장 시 내부 시스템을 평가하고, 상장 이후에도 모니터링을 하는 등 실질적인 대처가 시급하다는 주장이다.

전문가들의 생각 역시 소액주주와 다르지 않다. 한탕주의 심리도 결국은 시스템의 허점을 만나 범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촘촘한 관리 체계가 없다면 언제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상장사에 대한 철저한 내부 감시는 물론, 뜻밖의 횡령·배임 등의 사고가 발생할 경우 해당 범죄의 처벌 수위를 높이고 소액 주주의 권리를 보호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대책이 뒤따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전에 제대로 감독하지 못한 금융당국의 결단도 필요한 시점이다. 대규모 횡령 사고로 해당 상장사들이 경영난과 주가 하락에 이어 상장폐지 수순을 밟으면서 투자자들의 극심한 피해가 우려되고 있다. 당국은 이번 사건들을 계기로 감사에 관한 법률 보완 및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강화 등 더 치밀한 관리감독 체계을 구축하고, 더 이상 무고한 피해자들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인 개선이 급선무일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