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허운연 기자
  • 입력 2022.06.02 10:01

"양극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될 수도…새로운 중앙은행 역할 고민"

이창용 한은 총재가 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브리핑실에서 통화정책방향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유튜브 캡처)
이창용 한은 총재가 지난달 26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 브리핑실에서 통화정책방향 관련 기자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한국은행 유튜브 캡처)

[뉴스웍스=허운연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일 "확장적 재정정책과 저금리 및 비전통적 통화정책으로 쌓인 수요 압력, 팬데믹과 전쟁으로 인한 공급병목 현상으로 1970년대 수준의 높은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고 있다"며 "중앙은행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 총재는 이날 서울 중구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변화하는 중앙은행의 역할: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를 주제로 한 '2022년 BOK 국제컨퍼런스' 개회사에서 "코로나 위기 이후로는 경제 양극화가 확대되고 디지털·친환경 경제로의 전환이 가속화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 범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더욱 넓어졌다"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20여년 가까이 이어져 온 저성장·저물가 기조 속에 글로벌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노력해 온 정책당국은 급기야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보건위기까지 겪게 됐다"며 "위기 초기 수요와 공급 측면에서의 충격이 함께 발생한 가운데 특히 총수요 위축으로 원유 수요가 큰 폭으로 감소하면서 국제유가가 급락했고 이는 인플레이션의 하락 압력으로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또 "경제활동 재개로 인한 총수요의 회복은 경제 여러 부문에서의 공급 제약과 맞물리면서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게 됐다"며 "지난 수개월 동안 여러 국가에서 근원 인플레이션과 장기 기대인플레이션이 상승해 목표 수준을 상당폭 상회하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며 "중앙은행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요구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팬데믹의 충격과 그로 인한 회복 과정에서 계층·부문별 불균등이 나타났다. 이러한 양극화 현상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더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며 "지난 10여년간 중앙은행의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단 활용과 이 과정에서 나타난 자산가격 상승에 대한 부정적 인식 속에 중앙은행이 결자해지의 입장에서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이 나오고 있다"고 언급했다.

다만 "이러한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려 한다 하더라도 소득 양극화와 부문 간 비대칭적 경제충격의 문제들을 과연 통화정책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총재는 "이번 인플레이션이 진정됐을 때 장기 저성장의 흐름이 다시 나타날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전에 활용했던 정책들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선진국을 위시해 한국, 태국, 그리고 어쩌면 중국 등 인구고령화 문제에 직면해 있는 일부 신흥국에게 있어 저물가와 저성장 환경이 도래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며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폴 크루그먼 교수가 선진국 중앙은행에게 조언한 것처럼 한국이나 여타 신흥국들도 '무책임할 정도로 확실하게(완화적 통화정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해야만 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지난 10여년간 중앙은행의 실제 자산규모 변화를 보면 신흥국의 경우 그러한 사치를 누릴 여유는 없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G7 국가의 중앙은행 자산규모는 2007∼2020년 중 GDP 대비 3.8%에서 31.0%로 크게 늘어났지만 신흥국의 경우 4.0%에서 6.2%로 제한적인 증가에 그쳤다"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신흥국의 경기부진 정도가 선진국에 비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기축통화국이 아니라는 점도 신흥국 입장에서 재정이나 통화정책을 마냥 확장적으로 운용할 수 없었던 주요 제약 요인이었다"며 "선진국과 같은 비전통적 정책수단 활용은 자칫 통화가치 절하 기대로 이어져 자본 유출 가능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으로 인플레이션 기대 안착에 있어서도 선진국에 비해 신뢰성의 제약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신흥국은 통화정책 운용에 있어 보다 신중하고 보수적으로 행동해야만 했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과거 평균에 비춰봤을 때 지금 선진국이 직면하고 있는 고인플레이션 상황까지는 이르지 않게 됐지만 이를 다행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신흥국의 경우 선진국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장적 재정·통화정책과 더불어 일부 국가에서는 그간 터부시됐던 국채 직접 인수에까지 나섰음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럼에도 심각한 환율 절하나 자본 유출이 초래되지는 않았는데 이는 신흥국의 자산매입 등 비전통적 정책수단들이 금융위기나 코로나 위기 등 글로벌 공통 충격에 대한 세계적 대응 차원에서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며 "글로벌 유동성이 풍부한 가운데 선진국에서 훨씬 더 큰 규모의 자산 매입에 나섬으로써 국제금융시장에서의 신흥국에 대한 불이익은 크지 않을 수 있었다고 언급했다.

다만 "향후 개별 신흥국이 구조적 저성장 위험에 직면해 홀로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사용할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타날지는 의문스럽다"며 "대규모의 글로벌 유동성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에서 코로나 위기 극복 과정에서와 비슷한 수준의 확장적 정책이 다시 이뤄진다면 환율과 자본 흐름 및 인플레이션 기대에 미치는 함의는 사뭇 다를 것이다. 자국의 저물가·저성장 국면에 대비한 신흥국만의 효과적인 비전통적 정책수단은 무엇인지 분명한 답을 찾기 쉽지 않으며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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