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원성훈 기자
  • 입력 2022.08.30 18:33

"민주화보상법 따라 보상됐어도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는 국가배상책임 있어"

김명수 대법원장이 30일 '긴급조치 9호'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리고 있다. (사진=대법원 페이스북 동영상 캡처)
김명수 대법원장이 30일 '긴급조치 9호'에 대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리고 있다. (사진=대법원 페이스북 동영상 캡처)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박정희 정권 때 발령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해 옥살이를 한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가 배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판단이 나왔다. 이는 7년전의 '고도의 정치성을 띤 국가행위이므로 정부에게 배상 책임이 없다'는 판결을 뒤엎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오후 A씨 등 71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A씨 등은 1970년대 일체의 유신 반대 행위를 금지한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한 혐의로 기소됐다. A씨 등은 당시 영장도 발부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포돼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수감 생활을 했다.

이들은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위헌·무효 결정을 내린 뒤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어 '공무원의 불법행위로 옥살이를 하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며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1·2심 재판부는 이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양승태 대법원장 때인 2014년과 2015년 대법원이 내린 판례를 따랐다. 당시 대법원은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는 국민 전체에 대해 정치적 책임을 질 뿐 국민 개개인의 권리에 대응해 법적 의무를 지는 것은 아니다', '긴급조치는 위헌·무효 선언이 되기 전이라 수사나 재판을 한 담당자들이 위법성을 인식했다고 볼 수 없다'며 국가의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1·2심 재판부는 원고 중 일부가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국가로부터 보상금을 지급받은 점도 기각 이유로 들었다. 보상금을 받음으로써 '재판상 화해가 성립된 셈이기 때문에 별도의 배상을 청구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하지만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하며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판례를 내놨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긴급조치 9호 발령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 수사와 공소 제기(기소), 유죄 판결의 선고를 통해 현실화했다"고 밝혔다.

이어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의무를 소홀히 해 그 직무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며 "긴급조치 9호의 적용·집행으로 강제수사를 받거나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행사, 체포와 수사, 재판과 유죄 판결, 형집행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헌법에 위배된 기본권 침해 조치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봐야 하며, 그 과정이 전체적으로 헌법에 위배되는지 등에 대해 '객관적 주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면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결한 셈이다.

대법원은 또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을 받았다고 해도 '불법행위로 인한 정신적 손해'에 대해서는 여전히 국가의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긴급조치 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본 것으로, 과거에 행해진 국가 권력의 기본권 침해에 대한 사법적인 구제를 인정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이날 선고된 전원합의체 판결 요지에서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에 대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되는지에 대해 '인용' 판결을 함으로써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의 위법행위에 해당하므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하지만 김재형·안철상·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은 별개의견을 냈고 민유숙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냈다. 특히 김재형 대법관은 별개의견으로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적용·집행은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로서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따른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면서도 "다만 이 사건 국가배상책임 성립에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 반드시 구체적으로 특정되어야 한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했다.

또한 김선수·오경미 대법관의 별개의견의 핵심은 '영장주의를 배제한 긴급조치 제9호의 중대·명백한 위헌성과 긴급조치 제9호의 장기간 집행이나 구속재판 등으로 발생한 기본권 침해의 내용, 규모와 정도 그리고 법관에게 부여된 국민의 기본권 보호라는 헌법상 의무 등을 종합해 보면 긴급조치 제9호에 대한 위헌성의 심사 없이 이를 적용해 영장 없이 체포된 피고인에 대해 인신보호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유죄판결을 선고한 법관의 재판상 직무행위는 국가배상법 제2조가 정한 국가배상책임이 성립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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