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현건 기자
  • 입력 2022.11.30 16:44

[뉴스웍스=전현건 기자] "중대재해 처벌법으로 인해 중견건설사는 너무 힘든 처지에 놓여 있다. 대기업과 달리 현장 안전관리 관련한 인원도 너무 미약하고 지원도 없다. 그나마 있던 인원역시 두려움으로 인해 다른 곳으로 이직하고 있다. '재해 제로(0)'를 완벽하게 실천하기 어려운 환경이다"

한 수도권 중견 건설회사 직원이 기자를 만나자마자 답답함을 토로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현장 안전관리 인력이 제조·유통·물류 등으로 이직해 유출되는 상황이 늘고 있다. 다른 업계보다 상대적으로 위험 요인이 많은 건설업 특성상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사고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중견건설사의 경우에는 현장 안전관리 예산과 임직원 개별 보수는 그대로인데 사무 업무가 과중되면서 정작 현장에 직접 투입되는 인력이 줄어드는 역설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은 지난해 1월 8일 국회 본 회의를 통과해 올해 1월 27일부터 본격 시행됐다. 

중대산업재해는 산업안전보건법상 산업재해 중 ▲사망자가 1명 이상 ▲동일한 원인으로 6개월 이상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 2명 이상 ▲동일한 유해 요인으로 직업성 질병자가 1년에 3명 이상 발생한 경우를 말한다. 

중대재해처벌법에 따라 사업주나 경영책임자는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인력 및 예산을 마련하는 등 안전보건관리체계 구축 조치를 취해야 한다. 안전조치의무를 위반해 사망사고가 발생하면 사업주 또는 경영책임자는 1년 이상의 징역 또는 10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지고 부상자나 질병자가 발생하게 되면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으로 건설사 CEO들이 현장 사고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을 물게 되면서 건설 현장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특히 올해 4번의 사망사고를 기록한 DL이앤씨 등이 중대재해처벌법 수사 대상이 되면서 CEO들은 긴장의 끈을 놓치 못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건설사들은 안전관리 인력 및 예산 확대, 현장 안전관리 교육 실시, 안전관리 부서 신설 및 전담조직 운영 등 중대재해 예방에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정작 건설사들의 전국 각지 현장은 안전관리 인력난을 겪고 있다. 

본사의 압박이 커지면서 자연스레 업무는 과중되고 있지만 실제로 사고가 이어지면 CEO가 책임을 물게 된다는 부담감이 증가하면서 기피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중견기업들은 훨씬 큰 짐을 지고 있다. 대기업에 비해 예산과 기존 인력이 부족한 가운데 5인 이하의 건설사가 아닌 경우 중견건설사도 중대재해에 대해 동일한 처벌을 받게 되면서 늘어난 업무와 책임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중견건설 관계자는 "현장 안전관리 인력은 그대로인데  검찰·경찰 조사를 대비해 안전관리조치 등의 페이퍼 작업이 늘어나니 현장에 실제 투입돼 인부들을 인솔하거나 작업을 직접 관리하고 체크하는 일에 일손이 부족한 상황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대재해법은 중대재해를 예방하고 시민과 종사자의 생명과 신체를 보호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시행된지 벌써 1년이 다 되가지만 산업 현장의 혼란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 법 시행 이후에도 현장에서의 사망사고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 노동부에 따르면 올 들어 9월말까지 산업 현장에서 산재 사고 사망 노동자는 모두 510명인 것으로 집계됐다. 작년 502명에 비해 오히려 증가한 것이다. 처벌 강도를 높여도 중대재해가 전혀 줄지 않고 있다.

물론 중대산업재해를 줄이기 위해서 이러한 법이 철저히 운영돼야하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다만 처벌만이 전부가 아니다.

지난 29일 정부와 여당이 당정협의회를 열고 중대재해법 규제를 완화하기로 했다. 감독과 통제, 처벌을 넘어 사업주와 근로자 모두가 책임지는 자율 예방에 방점을 둔 대책이다.

성일종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29일 '중대재해 감축 로드맵' 관련 당정협의회가 끝나고 기자들과 만나 "현재 (우리나라 사망사고 만인율은)0.43이다. 당정은 2026년까지 OECD 선진국 수준인 0.29로 낮추는 것이 가장 큰 목표"라며 "현재와 같은 규제와 처벌만으로는 안 된다. 자기규율 예방 체계로 (패러다임을)바꾸겠다"고 말했다.

산업안전 모범국들은 처벌중심보다 사고 예방에 방점을 두고 있다. 사망 사고가 발생했을 때도 형사처벌이 아닌 과징금으로 책임을 묻고 있다. 영국은 1960년대 감독과 처벌을 강화했는데도 산재 사고가 감소하지 않자 1970년대 중반 사업장의 자율 예방으로 정책을 전환했다. 독일은 노사가 '재해예방규칙'을 제정해 시행하면서 사망 사고가 크게 줄었다. 일본의 산업안전법도 자율 안전관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업장마다 노사가 자율적으로 안전규칙을 만들어 사고를 예방하도록 하는 이번 정부의 규제 완화책은 바람직하다. 

다만 대기업보다 인력과 자금이 부족한 중견·중소 기업들을 위해서는 자율적인 예방만이 정답은 아니다. 현장에서 뛰는 관계자들은 행정업무 제반을 대부분 1인이 담당하고 있는 50인 미만 사업장의 현실에서의 중대재해법 적용은 실현 불가능한 측면이 있다고 강조한다. 전문 인력과 체계 구축을 위한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

2024년부터 중대재해법이 모든 사업장에 적용된다. 정부가 전문가를 적극 파견해 경영·사업·작업 활동의 근본적인 체질 변화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만 모두가 안전한 산업현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