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원성훈 기자
  • 입력 2023.06.26 10:01

무고한 사람 감금·폭행한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도 반독재 운동 시국 사건 분류

1988년 서울대 교문앞 시위. (사진=서울대학교 디지털 사진 자료관 캡처)
1988년 서울대 교문앞 시위. (사진=서울대학교 디지털 사진 자료관 캡처)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민주화 보상법에 따른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9844명에 이르는 것으로 25일 확인된 가운데 동의대·남민전 사건도 '민주유공자'로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는 4·19, 5·18 관련 유공자 5200여 명은 들어있지 않다.

9844명 가운데는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 사건 50명과 무고한 사람을 감금·폭행한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 5명을 비롯해 경찰 7명이 숨진 부산 동의대 사건 관련자 52명이 포함됐다. 더불어민주당은 최근 민주화 보상법과 별개로 민주화 관련자 9844명 중 사망·부상자 829명을 국가유공자로 예우하는 '민주 유공자법'을 추진하고 있다. 여기에도 남민전,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 동의대 사건 관계자 일부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정우택 국민의힘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정 의원실에서 분석해 25일 공개한 바에 따르면, 민주화 운동 관련자 9844명에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4587명), 전교조 결성 해직 사건(1690명), 통일 운동, 노점상 투쟁, 농민 운동(412명) 등이 포함돼 있다. 정부 관계자는 "야당의 '민주화 유공자법'이 통과되면 남민전 사건 2명, 동의대 사건 1명,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 1명이 유공자 예우를 받는다"고 피력했다.

하지만 6·25전쟁 73주년을 맞기까지 북한군과 빨치산 만행에 초점을 맞춰 민간인과 군경에 대한 명예 회복과 보상을 규정한 법률은 없었다. 민주화 운동은 물론 제주 4·3부터 여순·노근리 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특별법으로 진상을 조사하고 정부 책임을 따지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조해진 국민의힘 의원은 이날 6·25전쟁 전후로 북한군과 빨치산 등에게 희생당한 종교인들의 명예 회복을 위한 진상 규명 법안을 발의했다. 법안은 총리실 산하에 진상규명위원회를 만들어 조사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과거에 진실화해위원회 등에서 6·25 당시 남북 양측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기는 했다. 그러나 주로 우리 측의 책임에 초점이 맞춰져, 북한의 민간인 학살 조사는 미진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조 의원은 "과거사 평가는 형평성에 맞고 공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정부는 민주화 운동 관련자를 주요 사건 41건으로 정리했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규모로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4587명), 전교조 결성 해직 사건(1690명), 현대중공업 노동쟁의 사건(962명) 순으로 많았다. 상징성으로 단 1명이 하나의 사건으로 구분된 경우도 있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 최루탄 피격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민주화 운동 관련자 중에서 4988명에겐 보상금·생활지원금이 모두 1169억3000만원 지급됐다.

국민의힘은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사건도 무리하게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선정됐다"고 개탄했다. 실제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은 민주화 보상위원회(민주화 운동 관련자 명예 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논란이 있었다. 당시 동의대 도서관에 감금된 전경을 구출하려고 들어간 경찰 7명이 학생 측이 던진 화염병에서 일어난 불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화 보상위원회는 이를 반(反)독재 사건으로 분류하면서 "도서관 농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행위는 당시 노태우 정부의 권위주의적 탄압에 대한 항거에서 비롯됐다"며 "발생한 결과가 중대하다는 것만으로 민주화 운동 관련성을 부인할 사유는 되지 못한다"고 주장했다.

그 결과 동의대 사건의 52명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선정됐다. 하지만 경찰 유족이 항의하고 반발 여론이 비등하자 이후 동의대 사건 잔여 13건에 대해서는 불인정 결정을 내렸다. 위원회 내부에서도 민주화 관련자 선정 논리가 상충됐다.

1979년 발생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도 논쟁 소지가 있다. 실제 북한과 연계를 시도했다는 의혹이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민주화 보상위원회는 "유신 반대 활동이 명백하다"며 남민전 사건에 연루됐던 50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판단했다. 당시 '김일성 보고문' 작성 등으로 남민전 활동을 주도한 13명만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지 못했다.

민주화 보상위원회는 1984년 일부 서울대 학생회 간부들이 ‘프락치’로 의심된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감금·폭행한 이른바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도 반독재 운동 시국 사건으로 분류했다. 당시 피해자 4명은 프락치가 아니라고 법정에서 밝혀졌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언론 인터뷰에서 "집단 구타 후유증으로 정상적 사회생활이 어렵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민간인을 고문한 가해자 5명은 오히려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된 것이다.

1990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은 핵심 간부 박노해(본명 박기평), 백태웅씨만 민주화 운동 관련자가 됐다. 사회주의를 표방했지만 이들의 활동은 당시 권위주의적 통치에 대한 항거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다만 나머지 사노맹 연루자 100여 명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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