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원성훈 기자
  • 입력 2023.08.29 10:58
박민식(왼쪽) 보훈부 장관과 강기정 광주광역시장. (사진=박민식·강기정 페이스북 캡처)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정율성 역사공원 건립' 문제를 놓고 보훈부와 광주광역시가 전면으로 맞붙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직을 걸고 저지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반면, 강기정 광주시장은 국론을 분열하지 말라고 맞서는 양상이다.

박민식 장관은 지난 28일 전남 순천역에서 열린 '잊혀진 영웅, '호남학도병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행사에 참석해 광주시가 추진하는 '정율성 역사공원' 사업에 대해 "장관직을 걸고 반드시 저지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박 장관은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사람을 기리는 사업에 국민 예산을 쓴다는 것은 단 1원도 용납할 수 없다"며 "정율성의 공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 회의적"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정율성은) 국적도 중국으로 바꿨을 뿐만 아니라 (6·25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이 잘 싸우라고 응원한 나팔수 역할을 한 사람이지 않느냐"며 "수많은 광주 시민들·호남 주민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반대하는 사업을 지자체장이 강행하지 않으리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정율성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난징을 떠나 1937년 10월 중국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에 가서 본격적인 공산당 활동을 시작했다. 1939년 4월 오랜 심사 끝에 중국공산당 정식 가입이 승인됐고 그해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옌안 팔로군 본부는 한반도 공산화를 위해 김무정의 지휘로 조선의용군 전체 인원에 대해 조선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이에 정율성도 부인인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북한으로 향하게 됐다. 정율성은 1945년 12월 소련 군정 하의 북한 평양에 딩쉐쑹과 딸 등 가족과 함께 도착해 북조선인민위원회 소속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1945년 12월 말 해주시로 가서 조선로동당 황해도 도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 

정율성은 1947년 평양으로 올라와 소좌 계급을 달고 조선인민군의 전신인 보안간부훈련대대부의 구락부 부장 겸 협주단 단장이 됐다. 그는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이 창설되자 북한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김일성, 김두봉, 강량욱으로부터 표창장을 수여 받았고, 같해 11월 23일에는 북한 문학예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허정숙으로부터 상장을 수여받았다.

반면 강기정 광주시장은 보훈부에 국론을 분열시키지 말 것을 촉구했다. 강 시장은 이날 오전 시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율성 선생은 의열단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독립 운동가였다"며 "해방 이후 북한으로 귀국해 음악교수이자 노동당원으로 살았으며, 한국전쟁에는 노동당원으로 또 중국인민지원군 창작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예술 활동을 한 음악가이다. 이것은 추가 고증이 필요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라며 "그의 생애와 공과는 하나의 숨김없이 세상에 공개돼 있다"고 부연했다.

강 시장은 "문재인 정부시절인 지난 2021년에는 국립국악원 70주년을 기념해 그의 미공개 소장품을 전시하는 특별전을 개최했다"며 "지난 30년간 정율성 선생은 국익을 위해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됐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중 관계가 좋을 때 장려하던 사업을 그 관계가 달라졌다고 백안시 하는 것은 행정 업무를 혼란하게 만드는 것"이라며 "한 번 더 보훈부에 요구한다. 특히 보훈단체와 보수단체를 부추겨 광주를 다시 이념의 잣대로 고립시키려는 행위를 중단해 달라"고 촉구했다.

광주시는 정율성의 생가(동구 불로동)를 복원하는 한편 인근 국립아시아문화전당과 연계해 대규모 중국 관광객 유치계획으로 공사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 2018년부터 시작한 사업은 총 사업비 48억원 중 부지매입비만 30억원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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