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6.08.24 14:06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유명 작품 '비파행(琵琶行)'의 정황을 상상해서 그린 명대의 그림이다.

영화관에서 은막과 소리가 합쳐진 시점은 퍽 오래 전이다. 그 전에는 무성(無聲) 영화가 주류를 이뤘다. 소리 없는 은막에 때로 ‘비’가 내릴 적도 있었다. 흑백의 잔영으로 소리 없이 흘러 넘어가는 장면은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나름 큰 상상력의 공간으로도 작용했다.

그 소리 없음의 무성(無聲)을 떠올리면서 쓴 글이다. 예전에 이미 적었던 내용을 다시 만져 소개한다. 816년 가을이었다. 지금의 중국 장시(江西)성으로 좌천해 사마(司馬)라는 미관말직에 있던 당(唐)의 천재시인 백거이(白居易)는 ‘비파행(琵琶行)’이라는 명시를 남긴다.

그 해 가을 자신을 찾아왔다 돌아가는 친구를 강가에서 배웅하면서 쓴 시다. 친구를 보내려다 술 생각이 난 백거이는 작은 배에 들어앉았다. 마침 강변 나루에서는 비파 소리가 들려왔다. 감성이 풍부한 시인으로서는 그냥 흘려듣기가 어려웠던 소리였다.

그는 소리의 주인공을 찾는다. 수도 장안에서 한 때 잘 나가던 기녀(妓女)였다. 그러나 나이 들어 퇴기(退妓)로 전전하다가 결국 멀리 떨어진 곳으로 시집을 왔던 여인이었다. 그녀는 결혼 생활도 원만치 않아 결국 강변에서 비파를 켜며 살아가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이 중년 여인의 비파 타는 솜씨는 매우 뛰어났다. 연주를 감상하고, 그 분위기에 젖어 쓴 시가 바로 ‘비파행’이다. 백거이가 작품 속에서 비파소리를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큰 줄에서는 후두두둑 큰비가 떨어지고(大絃嘈嘈如急雨),작은 줄에서는 소근소근 낮은 말 소리(小絃切切如私語), 시끌벅적 요란하게 줄이 울리더니(嘈嘈切切錯雜彈), 큰 구슬 작은 구슬이 마구 쟁반에 떨어진다(大珠小珠落玉盤).” 중국인들은 이 대목에서 크게 흥이 난다. 뜻글자인 한자(漢字)의 아름다움이 극한으로 넓혀지기 때문이다.

그의 명구는 다시 이어진다. “꾸-욱꾹 새 소리 꽃 아래로 빠져나가고(間關鶯語花底滑), 흐르는 물은 여울목에서 끙끙거린다(幽咽泉流水下灘), 얼어붙는 물소리처럼 줄이 감기더니(水泉冷澀絃凝絕), 잠시 소리가 멈춰 끊기는 듯(凝絕不通聲暫歇).”

침묵이 소리를 대신했다. 하지만 그의 절창 중에서도 후대 사람들이 찬탄을 금치 못하는 대목은 다음이다. “달리 마음 속 깊은 곳의 수심이 올라오니(別有幽愁暗恨生), 이 때는 소리 없음이 소리 있음을 이기고도 남는다(此時無聲勝有聲).”

비파는 소리를 내는 악기다. 그 기능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데 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비파 소리가 갑자기 끊겨 소리 없음이 이어져 시인과 악기 연주자가 마음과 마음으로 이루는 소통은 오히려 비파가 울릴 때에 비해 더욱 강하다는 묘사다.

소리 없음(無聲)이 소리 있음(有聲)을 압도한다…. 좌천과 방황에서 인생의 공허함을 느끼는 자신과 어려운 삶으로 떨어진 퇴기의 허무감이 크게 소통하고 융합하는 대목이다. 소리 끊긴 곳에서 두 사람의 감성이 크게 합쳐지니 아이러니이기도 하면서 매우 절묘하다. 이를테면 ‘소리 없음’의 울림이 일반 소리의 그 것에 비해 더 크다는 얘기다.

우리사회는 늘 싸우면서 으르렁대는 사회다. 여당이 여당과 싸우고, 청와대와 보수 언론이 크게 부딪힌다. 야당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여야의 꼴사나운 대립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자고로 “큰 말씀은 오히려 말을 하지 않는 것(大辯不言)이고, 큰 인자함은 작게 나타나는 어짊에 있지 않다(大仁不仁)”고 하지 않았던가. 말로 큰 덕을 쌓은 사례는 별로 없다. 적은 언행(少言)과 침묵의 무게, 달변(達辯)이 아닌 눌변(訥辯)의 여백을 익혀보자. 더 큰 소통을 위해서.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