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04 15:20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한자 낱말이다. 보통은 “저 사람 아주 독선적이야…”라고 끌탕을 치거나 비판을 할 때 쓴다. 원래는 홀로(獨) 잘 하다(善)의 얽음인데, 이제는 저 혼자 잘 나서 남의 의견이나 생각 또는 감정 등을 무시하거나 배제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의 출발은 지금의 그런 쓰임과는 사뭇 다르다. <맹자(孟子)>에 등장하는 “어려울 때는 홀로 수양해 나아지려 노력하고, 형편이 나아지면 더불어 세상을 돕는 데 나선다”는 구절에서 나왔다. 한자로 적으면 “窮則獨善其身, 達則兼濟天下”다. 어려운 상황이면 여건을 감안해 스스로의 수양에 힘쓰되, 좋은 여건이 와서 기회를 맞으면 나아가 세상 뭇사람들을 도우라는 권유다.

그러니 여기서의 독선(獨善)은 어려운 형편에서도 뜻을 잃지 않고 나름대로의 노력을 기울여 제 자신의 학문과 소질을 닦고 개발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어쩐 영문인지 제 자신에만 공을 기울여 남은 전혀 도외시하는 못된 행위나 자세 등을 일컫는 말로 전의(轉義)했다.

독불장군(獨不將軍)도 같은 맥락이다. 남들은 다 “그렇다”고 하는데 혼자만 “아니야(不)”라고 우기는 경우다. 소신에 따른 제 의견 관철이면 그나마 괜찮은데, 소양과 학문, 나아가 자질에서 남들에 비해 나을 게 없는 사람이 마구 제 뜻만 우겨대니 문제다. 그런 사람, 또는 그런 상황을 우리는 ‘독불장군’이라고 지칭한다.

세상의 흐름은 저 자신만을 향해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다. 그러나 나라와 사회의 전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사람에게는 매우 중요한 대상이다. 충분히 뭇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 형편 등을 고려해 그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하는 사람에게는 더 그렇다.

따라서 고립(孤立)과 격세(隔世), 나아가 절세(絶世)는 위정자에게 큰 금물(禁物)이다. 세상의 큰 흐름과 함께 호흡하면서 시의적절(時宜適切)한 방도를 내놓을 줄 알아야 한다. 옛 동양에서는 그를 시무(時務)라고 적어, “때에 맞춰 힘을 써야 할 일”이라며 그 중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독선은 전횡(專橫)을 낳는다. 제가 옳다고 우기는 길에서 이리저리 오가면서 기존의 체계를 크게 어지럽히는 행위다. 아울러 독단(獨斷)도 따른다. 남의 의견을 청취하지 않은 채 함부로 결정을 내리는 일이다. 한 번 기울기 시작하면 편향(偏向)의 흐름을 낳는다.

그래서 당(唐)나라 태종 이세민(李世民)을 보필했던 중국 역사 속의 최고 명신(名臣) 위징(魏徵)은 ‘겸청(兼聽)’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여러 사람을 의견을 함께 듣고 또 들으라는 충고였다. 여러 사람의 뜻을 존중하고 받아들여 바람직한 방향을 잡으라는 얘기다.

‘중지(衆智)’의 중요성은 그래서 나라를 이끄는 사람이 늘 주목해야 한다. 여럿의 지혜가 모여야 오류를 범할 확률은 줄어든다. 독선과 독단, 전횡이 이어지면 중지는 채 모이지 않은 채 형체조차 없이 사라지고 만다. 그런 맥락에서 역대 동양 왕조의 집정자들이 주목했던 ‘집사광익(集思廣益)’이라는 성어도 주목할 만하다.

“여러 사람의 생각을 모아(集思) 널리 이롭게 하자(廣益)”는 취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뭇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 보이는 흐름, 때에 맞춰 힘써야 할 일인 시무(時務), 여러 사람이 모아주는 지혜인 중지(衆智), 그를 가능케 했던 겸청(兼聽)의 미덕이 다 자취를 감췄다.

박근혜 대통령이 그동안 보였던 독선 때문이다. 박 대통령이 대한민국 행정과 정치의 최고 정점이 아니라면 그나마 괜찮다. 문제는 한 나라를 이끌고 나갈 대통령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두 번째의 사과로써 어려워질 만큼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이 마당에서 여러 사람의 지혜인 중지(衆智)를 모으지 못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인 중지(衆志)를 합칠 수 없다. 그러면 난국(難局)은 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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