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14 10:28

사전에 따르면 한자 野(야)의 대표적 새김은 ‘들판’이다. 그러나 연원을 따져 올라가서 보면 원래 이 글자는 일정한 지역을 가리켰다. 공자(孔子)에 비해 연대가 더 거슬러 올라가는 주(周)나라 때의 쓰임으로 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당시의 이 글자는 구역 지칭으로 등장한다. 세상의 최고 권력자 천자(天子)가 있다는 왕도(王都)를 중심으로 100리(里) 바깥을 郊(교)라고 했고, 그로부터 다시 200리를 더 나가면 그곳이 바로 野(야)다. 그러니까 권력과 행정의 중심,  게다가 사람들까지 집중한 ‘타운’으로부터 가장 멀리 나간 외곽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가 사람의 성정(性情) 등을 가리키면서 “거 참 야비하네…”라고 끌탕 칠 때 등장하는 야비(野鄙)라는 단어는 사실 이와 관련이 있다. 野(야)와 鄙(비)는 거의 같은 구역, 또는 鄙(비)가 野(야)에 비해 왕도로부터 더 떨어져 있는 곳을 가리켰다고 본다. 왕도를 문명이 깃든 곳으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비(非)문명의 지역으로 보려는 차별적 시선이 읽힌다. 그래서 문명과 동떨어진 곳, 또는 그 지역의 사람을 야만(野蠻)이라 했다.

이 글자 野(야)가 정치권력의 유무를 가리키면서 특정 글자와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그 글자는 朝(조)다. 두 글자를 합쳐서 일컫는 말은 조야(朝野)다. 앞 글자는 정치가 행해지는 곳을 일컫는다. 정치적인 행위 모두를 일컫는 개념인데, 권력을 둘러싼 일반적인 정치행위 외에 국가와 사회의 행정 등도 이에 든다.

그런 마당은 보통 조정(朝廷)이라고 적었다. 이 조정은 일반적으로 ‘정치와 행정 등이 펼쳐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임금이 머무는 궁궐 전체를 지칭했다. 구별하자면, 앞의 朝(조)는 임금이 대신을 비롯한 대소 관료들과 정치를 논의하는 곳이다.

뒤의 廷(정)은 임금이 정치와 행정 등의 행위 외에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곳이다. 이른바 궁궐의 안쪽이라 할 수 있는 내정(內廷)을 가리킨다. 둘을 합쳐 부르는 말이 조정(朝廷)인데, 이는 아무래도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정치적 행위의 전반이 펼쳐지는 영역이라는 뜻으로 발전했다.

그렇지 않은 곳이 바로 野(야)다. 이곳은 정치와 행정 등 국가 사회의 중요한 일이 펼쳐지는 장소와는 다르다. 자연 그대로의 장소에 가깝고, 사람이 세속의 정치와 행정 등에 간여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을 문명적으로 차별화해 낮추 부르면 야만(野蠻)이기는 하나 꼭 그렇게만 볼 수는 없는 영역이기도 하다.

국가의 정치와 행정이 펼쳐지는 조정의 영역과는 다르게 신선하면서 세속에 찌들지 않은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조정 등의 사람들이 초야(草野)에 묻혀 지내는 사람들로부터 신선한 생각과 관념을 거꾸로 얻을 수도 있다.

어쨌든 조정에서 머물다가 이런 초야로 내려오는 일이 하야(下野)다. 원래는 그렇지만, 이제는 최고 권력에 있다가 원래 살던 곳으로 복귀하는 일을 가리킨다. 대통령이나 총리 등 권력 정점에 섰던 사람의 사회적 복귀를 지칭하는 단어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의 거취와 관련해 이 단어가 자주 쓰이고 있다. 중도에 제 권력의 행사를 멈추고 쫓기듯 내려오는 일이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의 하야는 아주 많은 혼란을 부를 수 있다. 그렇게 물러서서 불러들이는 일이 극심한 혼란이라면 심사숙고가 필요하다.

혼란을 잠재우면서 최선의 마무리를 하고 내려오는 일이 중요하다.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이미 감내할 수 없는 거대한 혼란을 불러일으킨 박 대통령에게 역사가 부여하는 마지막 사명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일 것이다. 신중하면서 진정성을 담아야 할 박 대통령의 마지막 미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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