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
  • 입력 2016.11.21 16:28

우리에게 친근한 말이 동창(東窓)이다. 그런 말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가깝게 여겨지는 명사다. 조선시대 문인이자 정치인이었던 남구만(南九萬 1627~1711)의 시조에 등장하면서 더 가깝게 다가섰던 단어이기도 하다.

영의정까지 지냈던 남구만은 시골에 내려가 정착한다. 그러면서 현지의 사람들에게 농업을 권장하는 권농가(勸農歌)를 하나 지었다. 그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 키우는 아이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저 긴 밭을 언제 다 갈려고 하느냐는 물음이 이어진다.

아이를 농사에 투입하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해 보인다. 집안의 노비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 세절은 따지지 말자. 아무튼 남구만은 햇빛이 먼저 드는 동녘의 창, 동창을 새로 밝은 날의 새 에너지로 보고 있다. 활력, 부지런함, 희망, 새로움의 이미지가 강하다.

동서남북(東西南北)의 사방으로 난 창은 제 각각 용도가 있다. 동창은 위의 남구만 시조에서 드러난 이미지가 강하고, 서창(西窓)은 고즈넉한 석양의 노을을 떠올리게 한다. 남창(南窓)은 북반구의 한반도에서는 따뜻하고 온화함이 주조(主調)를 이룬다. 햇빛이 늘 적당히 들어 춘하추동(春夏秋冬) 사계절을 보내는 데 가장 적당하다.

북창(北窓)은 차갑다. 역시 북반구의 한반도 특성 때문이다. 그래서 보통은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서재(書齋)에 여는 창문이다. 번거로운 일상을 피해 차분함을 유지하려는 사람에게 적당한 창이다. 그러나 동창의 경우는 중국에서의 쓰임이 우리와는 조금 상이하다.

같은 북반구의 중국이지만 중국인들이 동창을 대하는 시각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풍수(風水)의 관념으로 볼 때 중국인들은 동창을 ‘일이 많이 벌어지는 곳’ 정도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전란과 재난이 혹심했던 곳이라 품는 경각심이 한반도의 예에 비해 훨씬 높았기 때문이라고 짐작만 할 수 있다.

중국은 동녘 창을 두고 성어 하나를 만들었다. 동창사발(東窓事發)이라는 성어다. 연유는 이렇다. 남송(南宋)의 명장 악비(岳飛)를 죽음으로 내몰아 일반 중국인들이 ‘역사 속 최고 간신’이라고 여기는 진회(秦檜)가 주인공이다. 진회는 생전에 자신의 집 동창 밑에서 일을 꾸몄던 모양이다. 자신의 아내와 함께 말이다.

악비는 그의 모함에 걸려 먼저 죽고, 이어 진회도 죽은 뒤다. 도사(道師)를 불러 진회의 망령을 찾아가게끔 한 그의 아내는 도사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다. “끌려간 남편께서 아내에게 이런 말을 전하라고 합디다. ‘동창에서 꾸민 일이 들통 났다’라고요.”

물론 민담이자 야사에 불과한 이야기다. 저승에 간 진회가 도사에게 전해달라고 한 ‘동창에서 꾸민 일이 들통 났다’고 한 말을 가리키는 성어가 바로 東窓事發(동창사발)이다. 이 성어는 때로 동창계(東窓計), 동창사(東窓事)라는 말로도 표현한다. 모두 동녘 창문 아래에서 벌였던 음모와 계략 등을 일컫는 말이다.

그 때문인지, 아니면 날이 밝으면 또 험악한 일이 닥칠지 몰랐던 다사다난의 중국 인문적 환경 때문인지는 몰라도 중국인 마음속의 동녘 창은 기쁨과 환희, 에너지와 활력, 희망 등의 상징체계에는 들지 않는다. 그 대신 다시 벌어질지 모를 사태의 위험 요소, 새로 번지는 위기 등의 이미지가 강하다.

요즘 청와대의 동창은 어떨지 궁금해진다. 검찰은 대통령을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의 공범으로 규정했고, 추가로 발표하지 않은 혐의까지 손에 쥔 듯한 기세를 보인다. 대통령은 ‘의연’하게 그에 맞서고 있지만 아무래도 위태로워 보인다.

대통령의 의연함이 사태를 크게 수습하면서 나라의 안전을 먼저 걱정해 용기 있게 물러서는 쪽으로 이어지면 좋겠으나 그럴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동녘으로부터 희미하게 번지는 대한민국의 여명(黎明)이 청와대에서 만큼은 위기의 확산, 일의 번짐으로만 비칠 듯하다. 초조와 우려, 불안을 던지는 그 동창에서 박 대통령은 늘 어떤 아침을 맞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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