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유광종기자
  • 입력 2015.11.22 16:05

누군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죽음을 높여 부르는 한자 낱말이다. 두 글자 모두는 ‘가다’ ‘사라지다’의 새김이다. 가는 이가 있으면 오는 사람이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 사물, 현상이 오고 감의 큰 틀을 벗어나는 법은 좀체 없다. 더위가 가시면 추위가 닥치는 식이다.

逝(서)라는 글자의 용례는 일찌감치 등장했다. 공자의 발언에 나와 유명해졌다. 어느 날 강가에 선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가는 것이 다 이렇구나,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도다(逝者如斯夫, 不舍晝夜).” 물이 하염없이 흘러 지나가며 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 탄식이다.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누구라도 품을 수 있는 감성이다. 물은 그렇게 덧없이 흘러 사라질 뿐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다. 그런 맥락에서 떠올려볼 수 있는 명구는 북송의 문인 소동파(蘇東坡)가 냈다. “큰 강이 동쪽으로 흐르니, 물결이 천고의 풍류와 인물을 몰고 내려가는구나(大江東去, 浪淘盡, 千古風流人物)”라는 표현이다.

이승을 하직하는 일은 흔히 사망(死亡)으로 적는다. 작고(作故), 별세(別世), 운명(殞命), 사거(死去), 서세(逝世) 등도 일반적인 표현이다. 고인을 높여 부르는 낱말은 제법 풍부하다. 세상 뜬 사람을 존중하는 동양사회의 관습 때문이다. 대표적인 표현이 바로 서거(逝去)다.

돌아간 사람을 높이면서 문학적인 감성을 덧댄 표현 중 하나가 견배(見背)다. ‘등을 보이다’라고 옮길 수 있는데, 다시는 볼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그려 울림을 주는 표현이다. 하늘 세계로 돌아갔다는 뜻에서 귀천(歸天)으로도 적는다.

같은 의미의 말은 상천(上天)이다. 하늘로 올라갔다는 뜻이다. 선서(仙逝)라는 말도 있다. 작고한 사람을 신선세계로 떠났다고 보면서 하는 말이다. 과거 왕조 시대의 계급적 사회에서는 황제가 가장 높았다. 그가 죽었을 때는 흔히 붕(崩)이라는 글자를 사용했다. 임금이 죽은 것을 붕어(崩御)라고 적는 경우다.

그 아래 단계인 제후의 죽음에는 薨(훙)을 썼다. 먼 길을 떠난다고 해서 昇遐(승하)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그 밑의 사대부에게는 卒(졸)을 사용했다. 일반 벼슬아치에게 사용했던 글자는 逝(서), 여느 백성의 죽음은 死(사)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년에 이르지 못한 채 일찍 죽을 경우는 殤(상), 미성년까지 포함해 청장년일 경우에는 요절(夭折), 어떤 일을 하다가 세상을 등질 때는 殉(순), 정의로운 일 때문에 목숨을 바치면 就義(취의) 등으로 적는다. 이렇듯 세상을 하직하는 이에 대한 표현은 다양하다.

목숨이 다 해 저승으로 떠나는 이를 보면서 우리는 대개 옷깃을 여민다. 떠난 이를 애도하는 마음 때문일 테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세상 모든 삶이 덧없음을 떠올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연의 섭리를 새기면서 스스로 세상살이에서의 몸가짐을 바르게 하자는 뜻이다.

세상 떠난 이에 대한 평가도 중요하다. 蓋棺事定(개관사정)이라고 적는 성어가 그 경우다. 살아생전의 여러 공과(功過)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정리해 내리는 평가다. 망자(亡者)가 생전에 펼친 업적과 잘못을 엄격하게 다룸으로써 후세의 거울로 삼고자 함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떴다.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높아진다. 민주화의 상징으로 기록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IMF 금융위기를 부른 대통령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 모두를 공정하게 다룰 일이다. 그 개인에 대한 섣부른 포폄(褒貶)은 접자.

대한민국이 발전해 온 큰 궤적에서 공정하면서 차분하게 그를 평가해야 한다. 그를 통해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잘 해야 할지, 무엇을 고쳐 나가야 할지를 드러내면 좋다. 우리의 역사는 그러면서 완만하게 진보할 수 있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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