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노트] 정부·의료계, '국민 위한 겁쟁이' 되자
[취재노트] 정부·의료계, '국민 위한 겁쟁이' 되자
  • 전다윗 기자
  • 승인 2020.10.21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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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웍스=전다윗 기자] 1950년대 미국 젊은이들 사이 '치킨게임'이 유행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직선 도로 양쪽에서 각각 차를 몰고 상대를 향해 돌진하면 된다. 이때 충돌을 피하고자 핸들을 먼저 꺾은 사람은 게임에서 패배한다. '치킨(겁쟁이)'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는다.

만약 아무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충돌을 피하지 못해 둘 다 죽는다. 자존심을 굽히느니 목숨을 버리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치킨 게임은 서로 양보하지 않다가 파국으로 치닫는 상황을 묘사할 때 쓰인다.

2020년 한국에서도 치킨게임이 한창 벌어지고 있다. 좌측에서는 정부가, 우측에서는 의료계가 달리는 차에 몸을 맡겼다. 정부 정책에 반발해 시작됐던 의료계 파업이 가까스로 진정세에 접어들었지만, 의대생의 의사 국가고시 재응시 문제를 두고 2차전이 열렸다.

현재 의대 본과 4학년 대다수가 국시를 거부한 상태다. 총 응시 대상자 3172명 중 14%인 446명만 응시했다. 지난 8월 대한의사협회, 대한전공의협의회 등 의사 단체를 중심으로 일어난 총파업에 힘을 보태기 위해 의대생들도 단체 국시 거부를 택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부·여당과 의료계가 협의해 단체행동은 일단락됐지만, 의대생 대부분은 '국시를 거부하겠다'란 입장을 고수했다.

매년 약 3000명씩 배출되는 신규 의사가 올해 400여명에 그친다면 심각한 의료공백이 발생할 것이란 게 의료계 중론이다. 당장 내년에 병원을 지키는 인턴, 레지던트 중 25%가 없어지게 된다. 전국 응급실, 중환자실, 병동, 수술실의 진료에 차질이 생긴다. 장기적으로 공중보건의, 군의관 부족으로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하지만 정부와 의료계 모두 핸들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정부는 국시 재응시를 불허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혀왔다. "국민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또 국민적 공감대가 없는 상황에서 국시 허용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최근 보건복지부 국정감사에서 "의대생 몇 명의 사과로 국민 수용성이 높아질 것 같지 않다"며 대국민 사과를 종용하는 듯한 발언도 꺼냈다. 먼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라는 듯하다. 이참에 의사들 콧대를 눌러놓겠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아 보인다.

의대생들도 굽힐 생각이 전혀 없다. 지난달 '국시를 보겠다'고 성명은 냈지만, 국민에 대한 사과는 빠져 있었다. 지난 8일 주요 대학병원장들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국시 재응시를 허락해 달라"고 한 데 이어, 19일에는 충남·충북대 병원장과 삼성의료원·성균관대학교 의대 교수 360명이 "국시 재응시 기회를 달라"는 성명을 냈다. 이렇듯 '대리 사과'가 이어지고 있지만 의대생들은 '사과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현재 의대생들을 바라보는 국민 여론이 냉랭한 것은 사실이다. '국시 접수 취소한 의대생들에 대한 재접수 등 추후 구제를 반대합니다'란 청와대 국민청원이 57만명 이상의 동의를 받은 것만 봐도 명백하다. 허종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전국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의대생 국시 재응시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57.9%에 달했다. 찬성한다는 36.9%에 그쳤다.

상황은 이렇지만 의대생은 물론, 파업을 주도했던 의협·대전협은 꿋꿋하다. 의협은 "의대생 국시 재응시 문제와 관련해 대국민 사과 계획이 전혀 없다. 의대생 국시 거부는 정부의 일방적 정책 강행에 저항한 의로운 취지의 행동이었다. 사과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입장을 냈다. 대전협은 국시 거부 문제로 인턴 수급 등에 차질이 생기면 다시 단체행동에 나서겠다고 했다. '총파업 시즌2'도 불사하겠다는 각오다.

문제는 이들의 치킨게임에 국민이 볼모로 잡혀있다는 점이다. 신규 의사가 배출되지 않아 생기는 피해는 오롯이 국민 몫으로 돌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서로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다. 정부와 의료계 모두 과감하게 핸들을 틀어주길 바란다. '국민을 위한 겁쟁이'가 되어야 한다. 결코 오명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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