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2.04.18 17:45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꼭 이뤄야 할 인생 목표 25가지를 적어라. 그중 가장 중요한 5가지를 체크하라. 최우선 목표 5개를 달성하기 전까지 나머지 20개 목표는 쳐다도 보지 마라."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은 10년 넘게 자신의 전용기를 몰았던 조종사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버릴 건 과감히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다. 버핏과 전용기 조종사의 이 문답은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유명한 일화다.
주요 선진국과 반도체 패권 경쟁에 나선 우리나라도 버핏의 일화를 새겨야 할 때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기업 간 '경쟁'에서 국가 간 '전쟁' 단계로 접어든 상태다. 이미 국가 경쟁력을 좌우할 전략 산업으로 떠오른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한 각국 정부의 파격적 투자와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산업 하나를 겨냥해 국비 수십조원을 아낌없이 투입하는 경우도 흔하다.
미국은 최근 하원에서 자국 반도체 산업에 5년간 520억달러(약 62조원)를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미국경쟁법안'을 의결했다. 지난해 6월에는 미국 상원이 반도체 산업 육성을 위한 '미국혁신경쟁법안'을 통과시켰다. 해당 법안이 본격 가동되면 향후 10년간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이 19개가 세워지고, 국제 반도체 생산에서 미국의 비중이 4%포인트 늘어날 전망이다.
EU 집행위원회도 'EU반도체칩법'을 제정하고, 반도체 부문에 공공과 민간이 430억유로(약 59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미국과 아시아에 의존했던 반도체 산업 주권을 찾아오는 게 주된 목표다. '반도체 굴기'를 내세운 중국도 지난 2015년부터 반도체 분야에 거금을 투입하고 있다.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률을 70%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1조위안(약 190조원) 규모의 국가펀드를 조성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떨까. 지난해 5월부터 9개월을 표류한 끝에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이 겨우 국회 문턱을 넘었다. 하지만, '반도체 특별법'으로 불리는 이 법안은 경쟁국과 비교할 때 생색내기에 가깝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실제로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늘려달라는 요구는 수도권에 투자가 쏠리면 지방이 소외된다는 이유로 논의에서 제외됐다. 시설 투자 비용의 세액을 최대 50%까지 공제해달라는 요구도 최종 법안에선 최대 16% 세액 공제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마저도 대기업은 6%에 불과하다. 주 52시간제 탄력 적용 요구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더기 특별법'이란 비아냥이 나오는 이유다.
특정 산업 대기업에 특혜를 준다는 주장에 부딪혀 특별법 적용 범위도 두서없이 늘어났다. 반도체는 물론 이차전지, 백신까지 지원한다. 여러 산업의 입김이 들어간 탓에 정작 반도체 특별법의 의미가 퇴색됐다는 지적을 받는다. 경쟁국들은 반도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데, 우리는 뚜렷한 목표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는 형국이다.
"한 우물을 파라, 샘물이 날 때까지."
20세기 성자 슈바이처의 좌우명으로 유명한 말이다. 경쟁국들은 모두 샘물이 날 때까지 반도체 우물만 파고 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간 우물 하나도 못 팔 가능성이 크다. 특별법 시행 전 반드시 손을 봐야 한다. 어렵다면 차라리 새 반도체 특별법을 만들자. '대기업 특혜'는 미련한 변명이다. 미국과 유럽은 특별법을 만들어 반도체만 집중적으로 지원하는데, 왜 우리나라만 안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