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다윗 기자
  • 입력 2023.04.21 15:01

러시아 진출 韓 기업 160여 곳…주요 그룹 법인만 63개

현대자동차 러시아 공장에서 임직원들이 차량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홈페이지)
현대자동차 러시아 공장에서 임직원들이 차량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현대차 홈페이지)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러시아에 법인·생산거점을 둔 우리 기업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간접 시사하자, 러시아 정부가 '전쟁 개입'이라고 즉각 항의하면서 사안은 촉발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시장 재진입이 어려운 러시아 현지 사정을 고려해 선택한 '버티기 전략'이 러·우 전쟁 장기화로 기약 없이 길어지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날벼락을 맞은 셈이다. 

21일 주요 외신 보도를 종합하면 러시아는 최근 한국을 향해 연일 경고성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윤 대통령이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민간인에 대한 대규모 공격, 국제 사회에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대량 학살, 전쟁법을 중대하게 위반하는 사안이 발생할 때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인도적 지원이나 재정 지원만을 고집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언급한 것에 대한 반발이다.

러시아 측은 윤 대통령 인터뷰 이후 즉각 '전쟁 개입'이라며 발끈하더니, 이후 '적대 행위'로 간주한다고 발언 수위를 한층 높였다. 푸틴 대통령의 최측근인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자신의 SNS에 "한국 국민이 러시아의 최신 무기가 북한 손에 있는 것을 볼 때 뭐라고 할지 궁금하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급격히 냉랭해지고 있는 양국 관계에 러시아 현지에서 사업을 전개한 한국 기업들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있다. 최악의 경우 러시아가 현지 진출한 한국 기업을 제재할 수 있다는 관측이 업계에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러·우 전쟁 장기화로 규모가 대폭 감소했으나, 여전히 러시아는 한국 기업들에 중요한 시장이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러시아는 한국의 15위 교역 대상국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국은 10위 수출국, 5위 수입국이다. 한국은 러시아에서 석유제품·원유·석탄·천연가스 등을 수입하고, 자동차와 자동차 부품·가전·소비재를 판다. 전쟁 발발 이전 러시아는 한국의 10위 교역국이었다. 

현재 러시아에 진출한 우리 기업은 160여 개사에 달한다. 러시아에 법인·생산거점을 둔 대기업도 많다. 한국CXO연구소에 따르면 국내 76개 주요 그룹의 러시아 법인은 지난해 기준 63곳이다.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법인이 18개로 가장 많고, 삼성과 롯데도 각각 9개의 법인을 운영 중이다. LG(8개), CJ(3개), SK(2개), 두산(2개), KT&G(2개), HMM(2개) 등도 복수의 법인을 운영하고 있다.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등은 현지에 대규모 생산공장을 운영 중이다. 

2022년 기준 국내 주요 76개 그룹의 러시아 법인 현황. (자료제공=한국CXO연구소)
2022년 기준 국내 주요 76개 그룹의 러시아 법인 현황. (자료제공=한국CXO연구소)

러·우 전쟁 발발 이후 글로벌 주요 기업들은 러시아 현지 공장을 매각하거나 사업을 철수하면서 '탈러시아'를 선언했다. 반면 국내 주요 기업들은 러시아 법인 공장 가동을 멈추거나 구조조정을 했지만, 철수를 선택하지 않았다. 현대차는 지난해 3월 연 23만대 규모를 생산하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가동을 중단했고,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모스크바에 위치한 생산공장이 멈췄다. 인건비, 관리비, 유지비 등을 고스란히 떠안으며 버티기에 돌입한 셈이다.

이는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시장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시장 진입의 문턱이 높은 터라, 한번 철수하면 재진입이 어렵다는 점도 이러한 결정에 힘을 실었다. 버티기 끝에 성공한 경험도 영향을 미쳤다. 1998년 러시아의 모라토리엄(채무 지불 유예) 선언 당시 소니 등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에서 철수할 때 삼성전자를 포함한 국내 기업은 반대로 사업을 확장해 러시아 국민의 선호 브랜드가 됐다. 국제 유가 하락으로 러시아 경제가 휘청였던 2015년의 경우, GM 등은 공장을 폐쇄했지만, 현대차는 끝까지 시장에 남아 현지 점유율을 2위까지 끌어올렸다. 

문제는 러·우 전쟁이 예상보다 장기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당초 단기전으로 끝날 것이란 전문가들 전망과 달리 1년을 넘기며 장기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우리 기업들의 법인·공장이 멈춘 사이 중국 기업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도 뼈아프다.

전쟁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속이 타는 와중, 인터뷰 논란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된 기업들은 난감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다.

현지 진출 기업의 관계자들은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만약을 위해 내부적으로 대응 방안을 고심 중"이라는 원론적 입장만 밝힐 뿐이다. 관련 이슈에 대해 최대한 언급하지 않으려는 분위기도 읽힌다. 글로벌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국가 간 사안이기에, 기업 차원에서 입장을 표명할 경우 불필요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남몰래 속앓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다만 일각에서는 우리 기업들이 받게 될 악영향은 미미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러시아 입장에서 한국이 주요 수출·수입국인 점, 주요국들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현지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국가 중 하나라는 점, 양국의 경제적 능력을 고려했을 때 러시아 측의 타격이 더 클 것이란 점 등을 고려한 분석이다.

미국 등 서방의 제재로 고립된 러시아의 중국 의존도가 커지며 '경제적으로 종속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는 가운데, 이런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한국 시장을 쉽사리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란 분석은 다소 위안을 주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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