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은지 기자
  • 입력 2023.10.28 15:02
도요타 아키오 전 도요타자동차그룹 최고경영자(CEO). (사진출처=도요타 홈페이지)
도요타 아키오 전 도요타자동차그룹 최고경영자(CEO). (사진출처=도요타 홈페이지)

[뉴스웍스=정은지 기자] 전기차 시장에 위기감이 감돌고 있다. 국내는 물론 주요 시장마다 전기차 판매가 한풀 꺾인 것이다. 이에 주요 완성차 제조사들마다 전기차 투자 계획을 재검토하며 시장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특히 전기차보다 하이브리드 투자에 집중했던 일본 도요타는 이러한 분위기에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다.

◆도요타 아키오 회장 “세상이 실상 깨닫고 있어”

전 세계 완성차 판매량 1위인 도요타자동차의 전 최고경영자(CEO)이자 일본자동차공업협회 회장인 도요타 아키오 회장은 지난 25일(현지시간) 재팬모빌리티쇼(옛 도쿄모터쇼) 참가해 “나는 현실이라고 보는 것을 계속해서 말해왔고, 세상은 마침내 실상을 깨닫고 있다”며 최근 전기차 판매 부진 현상을 꼬집었다.

그의 발언은 전기차 개발을 등한시해 도요타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는 과거의 비판을 의식한 강한 반증으로 풀이된다. 아키오 회장은 전기차 시대가 오기 전, 하이브리드차가 중간 다리 역할을 할 것이라 확신했다. 높은 전기차 구매 비용과 충전 인프라 미비 등 해결할 과제가 산적해 하이브리드차가 우선이라는 판단이었다.

아키오 회장은 “탄소 중립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며 “전기차는 탄소를 배출하지 않지만, 그 동력인 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많은 탄소를 배출해야 한다”며 각국의 전기차 인센티브 정책과 규제 등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도요타는 지난 1997년 세계 최초의 양산형 하이브리드 모델인 ‘프리우스’를 위시로 하이브리드 라인업을 탄탄히 구축하며 시장의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도 하이브리드 모델을 앞세워 판매 대수가 1년 만에 2배 이상 늘어났다.

미국 시장에서는 없어서 못 팔 정도다. 올해 미국 내 도요타의 하이브리드 모델은 60만대 이상의 판매대수가 전망되며, 이는 전년 대비 7.5% 이상 증가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전체 도요타 차량 중, 하이브리드 모델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3분의 1 수준이다. 일부 하이브리드 차량은 차량용 반도체 공급난이 해소된 상황에서도 대기기간이 최대 1년 가까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켄터키주에 소재한 SK온과 포드 합작사 블루오벌SK의 켄터키 공장 건설 현장 모습. (사진제공=SK온)
미국 켄터키주에 소재한 SK온과 포드 합작사 블루오벌SK의 켄터키 공장 건설 현장 모습. (사진제공=SK온)

◆하이브리드차, 2030년까지 19.2%↑…전기차 판매 절반은 중국

도요타만 하이브리드 특수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전체 하이브리드 시장이 전기차 시대를 비웃듯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인 포춘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전 세계 하이브리드차 시장은 올해 360조원 규모로 전년 대비 19.2% 증가할 것으로 관측된다. 오는 2030년까지 연평균 7.3%의 꾸준한 성장률이다. 미국 시장만 국한하더라도 올해 하이브리드차 판매량은 약 140만대로 추산되며, 전기차 판매량 약 120만대를 앞지르고 있다.

이러한 추이는 국내에서도 확인된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1~9월 국내 누적 전기차 판매 대수는 11만7611대로 전년 동기 11만9841대보다 1.9% 감소했다. 반면 같은 기간 하이브리드차는 22만3872대로 지난해 같은 같은 기간 21만1304대보다 41.5% 늘었다. 

시장조사업체 캐널리스(Canalys)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전기차 위기감이 피부에 와닿는다. 올해 상반기 전기차 판매량 증가율은 전년 대비 49%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시기 63%와 비교하면 퇴보한 수준이다. 더욱이 전체 판매 전기차에서 절반 이상인 55%가 중국에서 판매된 것으로 나타나, 중국 외 다른 지역에서 전기차 인기가 시들해졌음을 간접 입증하고 있다. 

전기차 시장의 선두주자인 미국 테슬라가 지난 17일 3·4분기 실적에서 매출 233억5000만달러(약 31조6626억원)에 그친 것도 시장 분위기를 대변한다.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9% 늘어난 규모지만, 시장 전망치(241억달러)에 못 미쳤다. 더욱이 시장에서는 ‘가격 후려치기’ 수준의 대규모 할인 덕분에 실적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대자동차 초고속 전기차 충전소 '이피트'에서 전기차 '아이오닉5'가 충전 중인 모습. (사진제공=현대자동차)
현대자동차 초고속 전기차 충전소 '이피트'에서 전기차 '아이오닉5'가 충전 중인 모습. (사진제공=현대자동차)

◆‘전기차 대세론’ 믿는 현대차…실적 견인은 하이브리드차

하이브리드차의 화려한 부활에 완성차 제조사들도 다급해진 모습이다. 전기차를 최우선 순위에 놓고 전기차 생산 인프라를 앞다퉈 구축했지만, 이를 축소하거나 철회까지 검토하고 있다.

포드는 최근 SK온과 오는 2026년 가동을 목표로 설립을 추진한 켄터키주 두 번째 배터리 공장 가동을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전기차 생산 설비에 대한 120억달러(약 16조원) 규모의 투자도 축소할 방침이다. 여기에 3년 전 출시한 ‘F-150 하이브리드’ 모델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면서 해당 모델의 가격 할인을 결정했다. GM 역시 전기 픽업트럭 공장 가동을 1년 연기했고, 내년 중반까지 북미 지역 전기차 누적 생산량 40만대 생산 목표를 접는다.

반면 최근 3분기 실적을 발표한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기존의 전기차 전략을 수정할 계획이 전혀 없다며 전기차 대세론을 확고히 했다.

서강현 현대차 기획재경본부장(부사장)은 지난 26일 3분기 실적 컨퍼런스콜을 통해 “글로벌 권역별로 전기차 판매 계획이 기대보다 낮아질 순 있지만, 전체적인 총판매는 영향이 없다”며 “전기차 시장에서 수요가 잠깐 허들(장애물)은 있어도 기본적으로 우상향 곡선으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에, 미국 전기차 공장의 2024년 하반기 양산 일정을 늦출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다만 올해 3분기 현대차의 하이브리드 판매 비중은 전체의 8.6%로 지난해 2분기 5.7%보다 2.9%포인트 늘어나 실적 상승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같은 기간 전기차 판매 비중은 5.1%에서 6.3%로 소폭 확대돼 주춤한 모습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배터리 열폭주와 같은 안전 불안감, 충전 불편함,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내연기관차보다 떨어지는 주행거리, 소재 공급망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된 가격 인하 어려움 등 아직까지 전기차 대중화를 위한 과제가 많다”며 “여전히 전기차 대세론에 힘이 실리고 있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장기간의 숙제로 남는다면 당분간 하이브리드차가 득세하면서 전기차 시대가 더욱 늦춰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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