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15.11.14 16:04

김정호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굴지의 국내 대기업 CEO와 저녁 식사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왜 한국 기업들은 구글이나 애플처럼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을 인수해서 새로운 업종에 진출하지 않습니까?”

내심 미국과 한국 간 문화의 차이 같은 답변을 기대했지만 그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법 때문이란 것이다. 미국엔 없는데 한국엔 있는 배임(背任)죄가 가장 큰 이유라고 했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투자의 걸림돌 ‘배임죄’

한국 기업이 구글처럼 기술과 노하우만 있는 신생 스타트업을 1억 달러쯤 주고 인수했다고 하자. 제일 걱정스러운 건 그렇게 인수한 사업이 실패했을 경우다.

주주나 시민단체가 경영자를 대상으로 ‘배임죄’라고 고소나 고발을 한다면, 경영자는 현행법에 따라 ‘임무를 위배해 주주에게 손해를 끼쳤다’고 유죄 판결을 받을 수 있다.

배임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으면 민사상 손해배상을 해야 할 가능성도 높아진다. 설령 재판 과정을 거쳐 무죄 판결을 받는다 해도 검찰에 불려다니기 시작하면서 사회적으로는 이미 매장돼버린다.

성공하면 회사의 공(功)이고 실패하면 경영자가 죄인이 돼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 누가 그처럼 위험한 일을 감행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한국 기업들은 인수를 하더라도 이미 검증된 사업에 치우칠 수밖에 없다.

이때 검증된 기업이란 신생 스타트업과 달리 머지않아 시장환경이 바뀌면 쇠퇴할 수도 있는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어려움에 처한 계열사를 구제할 때도 배임죄는 걸림돌이다. 계열사 중 하나가 재정적 어려움에 놓여 다른 도움을 못 받으면 이 기업은 부도가 나게 돼 있다. 이런 일을 막으려고 다른 계열사를 통해 문제의 계열사를 도와주면 경영자는 그 순간부터 배임죄의 영역으로 들어선다.

계열사 지원이 성공해 그룹이 전체적으로 정상화될 경우 문제없이 넘어가는 게 일반적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때도 배임죄는 성립한다. 도움을 준 계열사 입장에선 손해를 봐가며 다른 계열사에 이익을 준 것이고, 그 결정을 내린 경영자는 배임죄를 저지른 것이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지난 몇 년동안 재판을 받았던 것 역시 성공한 계열사 지원 과정에서의 배임죄 때문이었다.

만약 계열사 간 지원을 했는데도 결국 그룹 전체가 부도에 이르렀다면 경영자는 거의 확실하게 배임죄 유죄 판결을 받는다. 1998년 김선홍 기아자동차 회장 이후 부도가 난 재벌그룹 총수들은 대부분 이런 이유로 배임죄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의 기준

배임죄를 피하려면 실적이 나쁜 문제의 계열사를 그냥 법정관리로 넘겨야 한다. 그렇게 하면 최소한 법적으로는 배임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부도를 인정하는 꼴이 돼 그룹 전체가 위험해질 수 있다. 당신이 책임 있는 경영자라면 어떤 선택을 내리겠는가.

성패 여부를 떠나 타인이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도 배임죄로 형사처벌 받을 가능성이 있다.

최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 주주들에게 고소당한 건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전사옥부지 인수 가격 때문이다. 부지를 지나치게 고가에 매입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눈엔 그렇게 보이지만 정몽구 회장 본인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해당 부지를 확보하겠다’는 각오로 높은 가격을 써낸 것일 수 있다. 그런데도 다른 주주들이 납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검찰로부터 배임죄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이다.

정몽구 회장이 비싸게 사서 문제라면 이석채 전 KT 회장은 회사 재산을 싸게 판 사실이 문제가 됐었다. KT 직원들이 회사 소유 건물을 저가 매각했다며, 이 전 회장을 고소한 것이다. 지난 9월 1심 재판에선 무죄로 결론 났지만, 검찰이 곧바로 항소해, 항소심에서의 지루한 법정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검찰은 유죄를 확신하고, 법원에선 무죄를 선고하기도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임죄의 판단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을 안 했거나 해선 안 될 일을 했다면’ 임무(任)를 위배(背)한 게 돼 배임죄의 적용을 받는다. 문제는 뭐가 해야 할 일인지, 하지 말아야 할 일인지 가르는 기준이 모호하다는 사실이다. 정상적 경영 행위를 해도 배임죄로 처벌받을 수가 있다.

◆ ‘배임죄, 대부분 선진국엔 없다’ 

    기업 손해, 민사재판으로 충분

우리나라 배임죄는 근본적 수술이 필요한 법 조항이다. 물론 회사 돈을 떼먹거나 거짓말을 해 주주나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 손해를 끼쳤다면 형사처벌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하지만 정직한 경영 판단마저 “상식에 어긋난다”거나 “실패로 끝났다”고 해 형사처벌하는 건 지나치다.

대부분의 나라엔 ‘배임죄’란 죄목 자체가 없다. 배임죄목이 있는 국가는 한국과 일본, 독일 등 3개국뿐이다. 그나마 일본과 독일은 우리나라와 달리 경영 행위에 대해선 배임죄가 자주 적용되지 않는다.

배임죄가 없는 나라에서 경영자의 정직한 업무상 결정은 연봉 수준이나 연임 여부에 영향을 줄 뿐 법적 분쟁의 대상이 되진 않는 게 일반적이다. 설사 법정으로 간다 해도 민사 재판의 대상이 될 뿐이다. 형사처벌의 적용을 받는 건 의도적 사기나 횡령 등 사익추구 행위로 국한된다.

난 평소 “배임죄란 죄목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주장을 할 때마다 주변에선 거센 반론이 쏟아진다. “배임죄마저 없다면 경영자의 부도덕한 행위를 어떻게 막느냐”는 논리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회삿돈을 떼먹거나 거짓말을 하는 등의 부도덕한 행동은 배임죄가 없어도 충분히 죗값에 걸 맞는 형법적용이 가능하다. 명확한 유죄사실이 드러나거나, 검찰이 입증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배임죄는 그 자체가 심하게 추상적이다. 검사의 주관적 견해가 개입할 요소가 있다. ▲정직한 실패와 계열사 지원 ▲자산의 매입 매각 가격과 관련된 경영상의 결정 같은 것들이 더 이상 형사재판 대상이 돼선 안된다. 그렇게 돼야 마땅하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정직한 경영 판단의 옳고 그름은 주주총회나 주식 시장의 평가에 맡기는 게 맞다. 꼭 법정에서 따져야겠다면 형사재판이 아니라 민사재판으로 다루는 게 우리 헌법의 정신인 ‘과잉금지의 원칙’에도 부합한다.


한국 기업의 경영 환경은 이미 글로벌화돼 있다. 상품의 생산과 판매도 이미 세계 시장을 무대로 이뤄진다. 이제 한국 기업과 경영자가 지켜야 하는 법도 글로벌 수준에 맞출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한 입법자들의 조속한 결단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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