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벼리기자
  • 입력 2016.11.01 15:06
[뉴스웍스=김벼리기자] 지난 31일 마침내 최순실이 검찰청에 등장했다. 하루 하고도 반나절이라는 시간 동안 ‘심신안정’을 하기에는 부족했던 걸까. 그는 다만 울먹이며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만 남긴 채 청사로 들어갔다.
 

최순실이 남긴 것은 하나 더 있었다. 최순실의 등장 직후 포토라인은 시위대와 기자들로 아수라장이 됐다. 그 와중에 최순실의 신발 한 짝이 벗겨진다. 이날 의상 ‘콘셉트’에 맞춘 듯 새까만 신발은 얼핏 투박해 보였다. 그러나 문제는 깔창에 박힌 브랜드였다. 새빨간 배경에 하얀 글씨, ‘PRADA’.

그런데 이 신발이 담긴 사진을 보는 기자의 머릿속엔 또 다른 신발이 오버랩됐다. 뜬금없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구두 한 켤레’ 속 구두. 엄밀히 말하면 이 구두를 둘러싸고 반 세기에 걸쳐 벌어진 논쟁 말이다.

발단은 마르틴 하이데거였다. 그는 1935년 ‘예술작품의 근원’이라는 책에서 이 회화 속 구두를 두고 “부드러운 대지를 밟던 여자 농부의 건강한 걸음이 눈에 들어온다”는 평을 남겼다. 그러나 30년이나 지난 뒤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가 이에 태클을 건다. 고흐는 이 그림을 1880년대에 그렸는데 당시 네덜란드의 농부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가죽 구두를 신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 구두는 농부의 것이 아니라 파리 뒷골목을 전전하던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샤피로는 풀이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샤피로의 하이데거의 비판 10년 뒤 자크 데리다가 등장한다. 그는 1978년 논문 ‘상환’을 통해 하이데거와 샤피로 모두를 비판하며 "구두 주인 찾아주기는 무익한 이론적 소동"이라고 일축했다. 하이데거나 샤피로 모두 자기 멋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달리 말해 데리다의 관점에서는 고흐의 ‘구두 한 켤레’는 그 무엇도 아니지만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묻는다. 그 누가 그림 속 ‘구두처럼 생긴 것’이 구두라고 단언할 수 있느냐고.

Vincent van Gogh, A Pair of Shoes, 1886

그렇다면 샤피로, 하이데거, 그리고 데리다의 시선으로 저 최순실의 ‘프라다’ 신발 사진을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범박한 수준이지만 기자가 한번 저들에 ‘빙의’해 보겠다.

우선 하이데거. 수십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신발이지만 모양새나 색깔이 화려하지 않고 투박하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이 신발의 주인은 갑부지만 갑부 티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신발 앞부분에 선명히 새겨진 주름들에서는 주인이 이 신발을 대충 꾸겨 신는 등 가볍게 여겼다는 점이 드러난다.

그리고 샤피로. 이 신발은 ‘비선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의 것이다. 여론의 질타를 피해 한동안 유럽에 도망가 있다 결국 귀국, 검찰에 출석하는 길에 신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릴 것이라는 점을 짐작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이런 고가의 신발을 신고 온 심리는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신발이 집에 있는 것들 중 제일 저렴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했거나. 아니면 영화 속 대사처럼 대중을 ‘개돼지’로 알거나.

마지막으로 데리다. 사진 속 저 물체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저건 ▲미르·K스포츠재단 운영 개입 및 자금 유용 ▲대통령 연설문 수정 ▲인사 개입 등 민간 신분으로서 국정을 농단한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의 신발일 수도 있으며, 누구의 말마따나 아직 '풍파를 견딜 나이'가 되지 않은 최순실의 딸 정유라의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뿐만 아니다. 신발처럼 보이지만 저건 신발이 아니기도 하다. 거무튀튀한 저것은 ‘어릴 때부터 친한’ 최순실과 그 무리들에게 경제를, 외교를, 교육을, 국가를, 국민을 가볍게 넘긴 박근혜 대통령의 기만이며, ‘분노’의 목소리를 잃었던 시민들의 아우성을 광장에 울려 퍼지게 한 ‘참을 수 없는’ 부조리함이다. 시민들의 무기력함, 절망, 비관, 피눈물, 그리고 수치, 그 모든 감정적 동요가 저 사진 속에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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