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수정
  • 입력 2016.12.19 10:48

어느날 오후 한산한 지하철에서 눈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건조함을 달래고 있었다. 갑자기 두 무릎에 따뜻한 기척이 느껴졌다.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아이 하나가 다가와 내 무릎에 손을 얹은 것이다. 내가 우는 줄 알고 그랬는지 두 손을 들어 울지 말라는 듯 흔들었다. 손을 내밀어 내 손등을 툭툭 쳤다. 예상하지 못했던 타인의 접촉, 예상하지 못 했던 따뜻한 온도에 낯선 아이를 끌어안아주고 싶었다. 무엇 때문일까. 아이의 접촉과 함께 건조한 눈은 촉촉해졌다.

내게 다가왔던 영화 같은 접촉은 이스트맨 존슨의 그림 ‘살짝 엿보기 Bo-Peep(The Peep)’와 똑같은 장면이 아닐까.

Eastman Johnson <Bo-Peep(The Peep)> 1872

이 그림의 주인공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다. 그림을 돋보이게 하는 데는 빛의 방향이 중요하다. 아이의 얼굴을 향해 직접 쏟아지는 빛은 아이의 천진한 표정에 뒤섞인 걱정스러움을 완연히 보여주고 있다. 아이의 보슬보슬한 금빛 머리는 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고, 아이가 입고 있는 흰옷은 하이라이트로 빛나 아이의 존재감을 더욱 강하게 한다. 이스트맨의 장기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깊은 어둠과 강렬한 빛을 강조하는 조명) 기법이 그 진가를 발한다. 성인 여성은 아마 울고 있었을 것이다. 그림을 읽으며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 그녀의 오른손에 쥐어진 두툼한 편지의 내용이 그녀를 울게 했을 것이다. 여성이 입고 있는 벨벳 소재의 검은 옷은 상복인지도 모르겠다. 소파 등받이에 걸쳐진 붉은 옷이 보인다. 여성은 편지를 읽고, 붉은 옷을 벗고 검은 옷으로 갈아입으며, 눈물을 그치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런 그이를 문틈 사이로 지켜보던 아이가 걱정스레 다가와 그 눈물을 닦아주었던 것이 아닐까?

이스트맨 존슨(Eastman Johnson, 1824~1906)은 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한 장르화가다. 미국 정신을 담은 예술인으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그는 부유하고 세력 있는 집안에서 여덟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사업가로서 경제적으로 능력이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도 유력했던 아버지는 막내아들의 그림을 굳이 막지 않았다. 존슨은 16세부터 2년간 리소그래피 공방에서 석판공의 도제로 미술 공부를 시작한다. 이십대가 되면서는 초상화 공부를 시작하고, 독학에 독학을 더해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을 완성한다. 이십대 중반이던 1848년, 이스트맨 존슨은 드디어 그림을 배우기 위해 미국을 떠난다. 독일 뒤셀도르프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온 그는 인간의 삶에 시선이 가는 자신을 파악한다.

그는 장르화(풍속화)가 발달했던 네덜란드로 다시 유학, 헤이그에서 3년간 머물면서 17세기 네덜란드 그림들을 연구한다. 존슨이 '미국의 렘브란트(American Rembrandt)'라고 불렸던 빛과 어두움의 명암, 색채, 구성의 자원들은 이때에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1855년, 이스트맨 존슨은 네덜란드를 떠나 프랑스를 거쳐 1856년, 고국으로 돌아온다.

고국에 돌아와 한 차례 경제적 어려움을 겪은 이스트맨 존슨은 빚을 갚느라 고단한 시기를 보내고 드디어 1859년, 뉴욕에 자기 스튜디오를 열고 열정적으로 작품을 소개한다. 자신만의 초상화 기법으로 무장한 그의 실력은 장르화가로서 곧 자리를 잡게 되고, 1861년부터 1865년까지 4년간 벌어진 남북전쟁 중 그는 더욱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1906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그려낸 그림들은 인간의 삶을 정직하게 그리고 그 진실함을 파악하고자 한 노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그림은 밀레의 그림처럼 정직하고 다정하고 진실했고,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빛과 어두움을 정확히 읽었으며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다.

따뜻한 타인의 접촉, 누군가의 온도가 누구에게나 절실하다. 그리고 가슴에 온기가 머문 인간은 다른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다. 어떠한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라도 순간의 접촉은 이루어지고 기적은 일어난다. 내 곁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아도 모르는 일이다. 100명 중의 한 명일 누군가는 당신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한다. ‘살짝 엿보기’의 아이 하나가 누군가의 고통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듯이 말이다.

글쓴이☞ 선화예고와 홍익대 미대를 졸업한 뒤 예술고등학교에서 디자인과 소묘를 강의했고, 지금은 중학교 미술교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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